close

[홍윤표의 발 없는 말]‘애국가 작곡’ 안익태는 야구선수였다

  • 이메일
  • 트위터
  • 페이스북
  • 페이스북
2011년 프로야구 페넌트레이스가 10월6일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무엇보다 역대 최다인 680만 9965명의 관중을 기록, 한국 프로야구가 700만 관중시대를 앞두고 있음을 널리 알린 것은 고무적이다. 한국 프로야구는 ‘흥행’에는 성공했지만 여전히 그 뿌리를 찾고 역사적인 인물을 기리는 데는 소홀하거나 미흡한 것이 사실이다. 출범 30년을 맞아 흘러간 인물들을 재조명하고 그네들의 업적을 기릴 수 있는 공간, 이를테면 야구박물관이나 명예의 전당 설립을 서둘러야한다는 주장이 강하게 나오는 까닭이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한국야구위원회(KBO) 기관지인 월간 <베이스볼 클래식> 10월호에 발굴 게재한 ‘애국가 작곡 안익태도 야구선수였다’는 글이 자못 흥미를 끈다. 그 글은 홍순일 전 문화일보 편집위원(현 대한야구협회 야구박물관 추진위원)이 발품을 팔아 캐낸 것이다. 홍 위원은 관계자의 육성 증언을 바탕으로 당시 신문보도 등을 샅샅이 뒤져내 ‘안익태가 야구를 했을 뿐만 아니라 야구운동가를 작곡하기도 했다’는 결론을 내렸다. <베이스볼 클래식>에 실린 안익태 관련 글을 인용해보면, ‘안익태가 야구를 한 사실을 보다 명확하게 밝히기 위해 숭실고교 행정실로 문의를 했다. 불행스럽게도 안익태의 행적을 밝힐만한 기록이 전무하다는 대답만 돌아왔을 뿐이다. 1948년 숭실학교가 공산 치하에서 평양을 떠나 남하할 때 모든 졸업생들의 학적부를 옮겨왔지만 6.25전쟁 통에 소실됐다는 거였다. 할 수 없었다. 물에 빠져 지푸라기를 잡는 심정으로 1997년 11월 숭실학교가 펴낸 ‘숭실 100년사’를 훑어보았다. 다행스럽게도 야구에 대한 기록이 있었다. 숭실학교는 1911년 4월 안세환(安世桓) 교사가 부원 34명을 이끌고 야구부를 창설한 것으로 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해 7월 7일 유니폼을 입었다고 밝히고 있다. 유니폼까지 입고 야구를 했다면 짜임새를 갖춘 팀이었을 텐데, 숭실학교가 밝힌 대회 출전은 10년이 지난 1921년  조선체육회 주최 동아일보사 후원으로 열린 제2회 전조선야구대회가 처음이었던 것처럼 기술하고 있다. (중략) 1922년 배재고보 운동장에서 열린 제3회 전 조선야구대회(10월 14~17일)에는 숭실중이 출전하고 있었다. ‘숭실 100년사’에도 “차재일 감독자의 인솔로 김재신 김찬전 임용업 옥종민 장병선 장병찬 이학영 권정규 안익태 박원규 전영길 등이 출전했다”고 밝히고 있다. 출전 선수 명단 속에서 ‘안익태’라는 이름이 눈에 들어온다. 제3회 전 조선야구대회를 보도한 동아일보(1922년 10월 14~18일자)를 봐도 중학단 경기에 중앙고보, 휘문고보, 대구계성고보, 배재고보, 정주오산학교, 평양숭실중, 송도고보, 경신고보 등 8개교가 출전한 것으로 되어있다. 숭실중은 예선전에서 경신을 10-6으로 물리치고 준결승전에 진출, 대구계성을 8-4로 제치고 결승전에 올랐으나 배재고보에 2-5로 패해 준우승에 그쳤다. 이 때 출전한 숭실중의 라인업을 보면 ①김찬전(金贊銓·중견수) ②이학영(李鶴永·투수) ③임용업(林龍業·우익수) ④안익태(安益泰·2루수) ⑤장병선(張炳善·포수) ⑥김재신(金載辛·유격수) ⑦옥종민(玉鍾珉·1루수) 장병찬(張炳燦·3루수) 권정규(權正奎·좌익수) 등으로 짜여졌다. 안익태가 4번 타자, 2루수로 출전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준결승전과 결승전에서는 ①권정규(좌익수) ②장병찬(3루수· <한국야구사>에는 장병태·張炳泰로 표기하고 있으나 ‘泰’가 오식이다) ③옥종민(1루수) ④김재신(유격수) ⑤장병선(포수) ⑥안익태(2루수) ⑦임용업(중견수) ⑧이학영(투수) ⑨김찬전(우익수)으로 라인업이 바뀌었다. 그 바람에 안익태도 6번 타자, 2루수를 맡았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아쉬운 것은 제3회 전 조선야구대회를 끝으로 안익태, 아니 숭실 야구가 이 대회에서 사라진 점이다. 그렇다고 야구부가 완전히 해체된 것은 아닌 것 같다. 15년이란 세월이 흐른 1937년, 일본 오사카에서 열릴 전국중등학교 우승야구대회(일명 고시엔대회) 서부조선 예선전에 숭실중이 2회전까지 진출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그런데 고개를 갸웃거리게 하는 것은 안익태의 연보(年譜)가 맞지 않는다는 점이다. 안익태는  1906년 12월 5일 평양에서 태어나 12살 때인 1918년 4월 숭실학교에 입학한 것으로 되어 있다.  ‘숭실100년사’를 보면 “2학년 때인 1919년 3·1운동에 연루되어 마우리(Mowry, E.M.) 선교사 집에 피신해 있다가 1920년 일본 구니다치(국립)음악학교에 입학했다”고 기술하고 있다. 또 ‘한국민족문화대백과’를 보면 “1919년 3·1운동에 가담, 숭실중에서 퇴교당한 뒤 1921년 교장인 마우리 박사의 배려로  세이소쿠(正則)중학 음악특기자로 입학”한 것으로 되어 있다. ‘안익태 기념재단’도 “1921년 동경 세이소쿠중학교에 음악특기자로 입학했다”고 밝히고 있다.  하지만 1966년 11월 경향신문의 김경래(金景來)가 쓴 ‘코리아 환상곡’(현암사 간)에는 안익태에 대해 보다 더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이를 요약해 보면 “안익태는 1905년 12월 5일 평양에서 7형제 중 셋째로 태어났다. 13세 때인 1918년 4월 숭실중학에 입학, 바이오린과 트럼펫을 잘 불어 숭실전문학교 오케스트라 단원이 됐다. 그러나 1919년 3.1운동에 연류되어 퇴학을 당한 안익태는 1920년 4월 일본 도쿄에서  죠치(上智)대에 다니는 큰형 익삼(益三)의 주선으로 우에노(上野)중학에 편입하기 위해 수속을 밟았다. 하지만 숭실중에서 교사 배척운동과 항일운동을 했다는 이유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할 수 없이 1년을 쉰 안익태는 이듬 해(1921년) 봄 5년제인 세이소쿠중학에 1학년으로 입학했다” 고 되어 있다. 그렇다면 1922년 10월 제3회 전 조선야구대회에 출전한 안익태는 다른 사람이란 말인가? 그건 아닌 것 같다. 안익태는 적어도 1922년 9~10월엔 일본이 아닌 국내에 머물고 있었다. 이를 뒷받침할 수 있는 기록이 ‘숭실동창회 기념식’이다. 1922년 10월 6일자 동아일보를 보면 “평양 숭실중학교 동창회에서는 9월 23일 하오 8시 동교 상층(上層)에서 동회 창립 1주년 기념식을 거행하였는데 회장 최원택(崔元澤)씨 사식 (司式) 하에 안익태(安益泰)군의 바이오린 연주가 있었다”는 기사를 싣고 있다.  이 시기는 방학기간도 아니었다. 그런데 어떻게 국내에서 연주도 하고 야구대회에 출전한 것일까? 안익태가 야구선수였다는 사실은 앞서 설명한 정황만으로도 충분하다. 그러나 이를 더 뒷받침 할 수 있는 증언도 있다. 1985년 6월에 작고한 원로 야구인 최인식(崔仁植·전 조선중앙일보 편집국장) 씨가 남긴 말이다. 그는 생전에 “안익조(安益祚)와 동생 안익태는 숭실중학에서 야구를 했다”는 말을 남겼다고 그의 장남인 최진(崔震·전 주 중국공사) 씨가 전해줬다. 그뿐이 아니었다. 안익태는 도쿄국립음악학교에 재학 중이던 1928년 형(안익조)이 단원으로 있는 도쿄유학생야구단을 위해  ‘야구단 운동가’에 곡을 붙여주기도 했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안익태는 유학생 야구단이 연습장으로 이용하던 도쿄 다카다노바바역 옆 연병장에 수시로  놀러와 유학생들과 어울렸다는 말도 들었다고 최진 씨가 들려줬다. 그리고 최진 씨는 지금도 선친이 생각나면 이 ‘운동가’를 불러본다고 했다. “원한과 분격뿐인 한국남아야/ 고국산천 떠나서 이역 천지에/ 고독과 벗을 삼아 누개성상(累個星霜·여러 해)을/ 누구를 위해 분투하느냐/ 한반도야 잘도 잘 있거라/ 우리는 너의 회포 풀으리로다”
‘야구단 운동가’ 가사는 제8차 도쿄유학생모국방문야구단 주장인 박석기(朴錫紀)가 작사한 것이라고 했다. 박석기는 당시 도쿄제국대 불문과에 재학 중이었다. ‘운동가’는 안익태가 곡을 붙여주는 바람에 선수들이 기차나 자동차로 이동할 때면 합창을 하면서 단결심을 북돋우곤 했다고 한다.’ 길게 인용했지만, 안익태의 행적을 여러 자료를 통해 추적한 이 글을 보면 틀림없이 야구를 했다는 사실이 입증된다. 우리나라 선각자들은 지덕체(智德體) 합일을 추구했는데, 안익태가 야구를 했다는 사실은 일제 치하의 지식인들이 운동에도 큰 관심을 기울였음을 알 수 있는 소중한 근거일 것이다. 1999년에 KBO와 대한야구협회가 공동으로 펴낸 <한국야구사>23쪽에는 ‘음악가 安益泰 출전’의 제목 아래 ‘애국가의 작곡자 안익태가 야구선수로 활동했다는 것은 종래에 밝혀지지 않았던 사실이다’고 운을 떼고 홍순일 위원의 장을 뒷받침할 만한 내용을 간단히 적어놓고, 끄트머리에 ‘안익태는 야구선수로서는 이렇다 할 업적을 남기지는 못했지만 한국의 대표적인 음악가가 야구선수로서 출전했었다는 것은 흥미로운 대목이 아닐 수 없다.’고 실었다. 홍순일 위원의 글은 아리송했던 ‘야구 선수 안익태’의 사실을 재확인하고 안익태가 야구운동가도 작곡했다는 것을 처음으로 이 세상에 알렸다는 점에서 큰 뜻이 있다고 하겠다. 숨겨진, 알려지지 않은 야구사의 인물들을 재조명하는 것은 개인의 노력도 노력이거니와 KBO나 대한야구협회 차원에서 조직적으로 움직여야 마땅한 일이다. 그런 면에서 사장돼 있는 사료나 유명을 달리한 야구계의 큰 인물의 유품 등을 한시바삐 확보해야한다. 그러자면 당연히 보상 문제도 고려해야할 것이다. KBO는 내년도 예산 편성 과정에서 야구박물관 설립에 따른 비용을 감안해야할 필요가 있다.   홍윤표 OSEN 대표기자 <사진>애국가 작곡가 안익태와 안익태가 야구운동가를 작곡했다는 사실을 증언해준 최진 씨(전 주 중국공사) (홍순일 전 문화일보 편집위원 제공)
OSEN 포토 슬라이드
슬라이드 이전 슬라이드 다음

OSEN 포토 샷!

    Oh! 모션

    OSEN 핫!!!
      새영화
      자동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