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적’은 자력으로 스노우볼 영화가 된 걸까
OSEN 손남원 기자
발행 2014.08.18 07: 32

[OSEN=김범석의 사이드미러] 코미디 영화 ‘해적: 바다로 간 산적’이 개봉 주를 뛰어넘는 2주차 스코어를 기록하며 흥행 그린라이트를 밝혔다. 수작까진 아니어도 장르와 교환 가치에 합당하면 관객이 외면하지 않는다는 수요 공급 법칙을 떳떳하게 보여준 것이다.
6일 개봉한 ‘해적’은 일주일 중 가장 관객이 붐비는 토요일을 두 차례 보냈다. 개봉 첫 주 토요일인 지난 9일엔 47만 명을 동원했고, 2주차인 16일엔 2만 명이 증가한 49만 명을 불러 모았다. 하루 전인 광복절 휴일엔 이 보다 많은 51만 명이 ‘해적’을 봤고, 17일 오전 400만 고지를 밟으며 1차 베이스캠프를 차리는데 성공했다. 근소한 차이지만 2주차 스코어가 개봉 첫 주 보다 높은 스노우볼 효과가 가시화된 것이다.
영화계에선 이렇게 2~3주차 스코어가 더 높은 현상을 속어로 “개싸라기 났다”고 말한다. 첫 주 미지근하던 영화가 입소문이 나면서 손님이 불어나는 현상을 가리키는 업계 은어다. 처음엔 작고 단단하던 눈뭉치가 굴리면 점점 커진다는 점에서 스노우볼 영화라고도 부른다. ‘과속스캔들’ ‘써니’가 전형적인 이 방면 형님 영화들이다. 이런 영화의 특징 중 하나는 높은 포털 평점인데 ‘해적’은 꾸준히 8점대를 유지하고 있다.

‘해적’이 이렇게 스노우볼 효과를 낼 수 있었던 건 무엇보다 영화 자체의 미덕 덕분이지만, 주변 배급 상황의 도움도 무시할 수 없었다. 호불호가 갈린 ‘군도’가 일찌감치 체력이 소진돼 종영 수순을 밟으며 ‘명량’과 2파전 양상을 띤 게 결정적인 보약이 됐다. ‘해적’ 제작진은 섭섭할지 모르지만 ‘명량’을 보러 온 가족 관객들이 표가 없자 대체제로서 ‘해적’을 택한 경우가 적지 않았다는 생각이다. 의도치 않게 ‘이삭줍기’의 반사 효과를 본 것이다.
영화를 보고나면 만족도가 높아지지만 막상 지갑을 열기까지 어려운 영화들이 취하는 마케팅 전략이 바로 앰부시 기법이다. 1등 뒤에 바짝 붙어 시장의 파이를 키우며 자사 매출과 영업이익을 높이는 전략인데 ‘해적’이 그 효과를 톡톡히 봤다. 보수적인 롯데답지 않게 개봉 전 이례적으로 3만 명을 대상으로 한 시사회도 좋은 입소문을 내는 마중물 역할을 했다고 본다.
여전히 뒷심이 만만치 않지만 천만 돌파 후 서서히 하락중인 ‘명량’의 좌석점유율도 ‘해적’ 입장에선 호재로 작용했다. 장기 흥행 여부를 가늠할 수 있는 ‘해적’의 좌석점유율은 휴일 평균 70%가 넘는데 11일을 기점으로 ‘명량’을 추월했고 서서히 그 격차를 벌리고 있다. 이 같은 점유율은 극장 프로그래머들이 상영관을 교체하거나 간판을 내릴 때 판단 근거로 사용하는 주요 지표 중 하나다.
또 하나 무시할 수 없는 변수는 ‘해적’ 다음으로 타석에 들어선 봉준호 표 ‘해무’였다. 하지만 대중적이지 않은 국제영화제 출품용 영화 같다는 평가가 발목을 잡으며 ‘명량’과 ‘해적’의 적수가 되지 못하고 있다. 이렇게 되면 롯데 입장에선 추석 라인업 ‘타짜: 신의 손’이 개봉하는 9월 3일까지 별다른 고민 없이 ‘해적’ 간판을 걸 수 있게 된다. 이 추세라면 손익분기점(430만 명) 돌파는 시간문제이고 조심스럽게 600만 고지도 넘볼 수 있는 분위기가 만들어진다. 여기에 쇼박스와 NEW가 마땅한 추석 영화를 내놓지 못 한다는 점에서 CJ와 롯데가 여름에 이어 가을 극장가까지 양분하지 않겠냐는 전망이 나온다.
이석훈 감독은 개봉 전 “해적이 캐리비안 해적 시리즈 보다 재밌다”고 말했다가 일부 네티즌들의 분노 섞인 악플 테러를 당했다. 자기가 만든 영화를 재밌다고 한 게 무슨 잘못이 될까 싶지만, 캐리비안의 열성팬이 적지 않다는 점에서 의도치 않게 봉변을 당했던 거다. 그는 “일단 BEP를 넘겨야 하고, 고생한 배우들에게 다음 영화 출연 기회가 보장돼야 한다는 부담감에 그런 발언을 했던 것 같다. 경솔한 측면이 있었지만 다른 영화를 깎아내리기 위한 의도는 아니었다”고 해명했다. 그러면서 “하루만이라도 우리 해적이 명량을 이겼으면 좋겠다”는 인간적인 바람도 보탰다.
‘해적’은 만듦새와 서사구조가 뛰어난 영화는 아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적당히 말장난이나 슬랩스틱으로 웃기기만 하면 된다는 막가파식 코미디는 더더욱 아니다. 욕설을 배제한 채 유해진의 ‘음파음파’와 서로 수갑이 채워진 장사정과 여월의 바다 소변신 같은 장면은 웬만한 코미디 감각이 없는 감독이라면 시도하기 어려운 장면들이다. 관객이 뭘 좋아할지, 어느 지점에 웃음 포인트를 묻어놔야 할지 세련된 상황 코미디에 능한 이석훈이기에 가능했다.
‘해적’은 웬만큼 웃고 난 뒤 화장실에서 ‘유치했다’고 불평하는 일부 관객들의 이중 심리까지 AS해줄 필요는 없을 것 같다. 그건 불만이든 호평이든 상품 이용 후기를 남기며 이미 지불한 관람료와 시간을 보상받고 싶어 하는 지극히 정상적인 경제 활동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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