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독재자’ 설경구, 이 영화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
OSEN 손남원 기자
발행 2014.10.21 16: 34

[OSEN=김범석의 사이드미러] “내가 누구인지 말해줄 수 있는 사람은 누구인가” 영화 속 연극 ‘리어왕’의 이 독백은 많은 걸 함축한다. 극중 이 외마디 대사는 엄숙주의가 팽배하던 군사 정권 시절, 배역에게 송두리째 자신을 잡아 먹혀버린 한 무명 연극배우의 슬픈 외침인 동시에 세상과 아들에게마저 단절된 채 숨죽여 울어야 했던 방전된 아버지의 쓸쓸한 뒷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나의 독재자’(이해준 감독)는 아들에게 자랑스럽고 싶었지만 시대와 배역을 잘못 만나 미치광이로 살아야 했던 한 무명 배우의 이야기다. 이 영화가 흥미롭게 다가온 건 배우와 아버지로서의 내적 갈등과 혼란 그리고 봉합과 흔들리던 정체성을 회복하는 과정이 철저하게 두 축으로 분리돼 전개된다는 점이다. 마치 두 편의 영화를 보는 것 같은 착각이 들지만 짜임새 있는 둘 사이엔 이물감이 전혀 없고 시간 흐름에 따라 자연스럽게 스며든다.
 설경구의 연기는 두 말하면 입 아프지만 언제부턴가 반복과 매너리즘에 갇혀있다는 아쉬운 느낌을 준 게 사실이다. 그러나 이제 그의 연기 인생은 ‘나의 독재자’ 이전과 이후로 나눠도 될 만큼 이 작품에서 선명하고 굵직한 발자국을 남겼다. 순박한 공단 청년부터 광주항쟁에 투입된 공수부대원에 이어 정보과 고문 형사로 엄청난 높낮이의 연기 진폭을 보여준 데뷔작 ‘박하사탕’(00)의 히스테릭하면서 광기어린 연기를 다시 만날 수 있었던 건 최고의 기쁨이자 수확이었다.

 성근(설경구)이 풍만한 김일성이 되기 위해 한밤중 게걸스럽게 폭식하던 중 냉장고 속 스테인리스 김치통에 굴절 반사된 그의 미쳐가는 얼굴과 눈빛은 근래 보기 드문 호연이었다. 아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22년 만에 대통령을 상대로 완벽하게 김일성에 빙의돼 남북정상회담 리허설을 주도하는 모습도 처연할 만큼 눈시울이 붉어졌다. 뜨거운 연기를 뜨겁게 표현하는 배우는 많지만, 설경구처럼 임계점 높은 연기를 차갑게 식혀서 보여주는 절제미 갖춘 배우는 희귀하다.
 이렇게 설경구의 연기가 돋보일 수 있었던 건 전적으로 반대편에 박해일이라는 든든한 버팀목이 있었기 때문이다. ‘형이 하고 싶은 대로 마음껏 내질러봐. 내가 다 받아줄게’ 같은 온기어린 눈빛과 둘만의 동지애적 교감이 영화를 박진감 있게 잘 살렸다. 과대망상에 시달리는 아버지 때문에 사춘기 시절 인위적인 고아가 돼야 했던 태식(박해일)은 아버지를 버리고 인생 한 방 탐욕을 쫓지만, 뒤늦게 마룻바닥 밑 보물창고에서 외면했던 아버지의 본 모습을 발견하고 나서야 참회의 눈물을 쏟아낸다. 15세 관람가이지만 불효자 관람불가로 등급을 바꿔야 할 것 같은 명장면이었다.
 표면적으로 김일성이라는 반갑지 않은 인물을 내세웠다는 점이 흥행의 변수로 작용하겠지만 이 영화가 내포하고 있는 부정이라는 주제의식이 또렷하고 울림이 적지 않다는 점에서 감점 요인으로까지 번지지는 않을 것 같다. 오히려 반공 이데올로기를 과잉 주입하며 체제 유지와 정권 재창출에 사활을 건 군사 정권의 야수성을 부각시키는 반사판 구실을 했다는 생각이다.
 땜빵 단역 배우가 각하를 향한 과잉 충성에 눈이 먼 중앙정보부에 캐스팅 돼 반공 콤플렉스에 휘말리는 과정이 그럴 듯하게 펼쳐지지만 웃음 포인트를 적절하게 분산하는 치밀함은 다소 아쉬운 대목이었다. 가령 성근이 취조실에서 살을 찌우기 위해 짜장면을 폭식하는 장면에서 얻어터지며 ‘탕수육, 양장피’를 외치는 신에선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분간이 되지 않았다. 요즘 말로 ‘웃픈’ 상황일 텐데 성근의 마트 현지지도 소동 장면을 포함해 이런 몇몇 장면들이 감독의 계산된 연출 의도인지 아니면 어정쩡하게 그려진 잉여인지 궁금했다.
 금성과 이코노 등 1970년대 시대상을 재현하기 위한 미술과 소품도 반가웠고, 엄숙주의 시대의 희생양을 상징하기 위한 염소의 등장도 감독의 센스가 묻어났다. 하지만 철거 위기에 직면한 성근의 허허벌판 위 낡은 양옥집은 크로마키와 컴퓨터그래픽 흔적이 너무 많이 나 리얼리티를 해쳤다. 집을 허물기 위해 다가오는 포클레인을 상대로 성근이 화염병을 던지며 저항한다는 설정도 다소 과잉으로 여겨졌다. ‘천하장사 마돈나’(06) ‘김씨표류기’(09) 등 사회적 소수와 루저들의 이야기를 따뜻하게 보듬어온 이해준 감독의 5년 만의 신작이다. 30일 개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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