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트’ 바위는 끈질긴 낙숫물에 반드시 뚫리게 돼있다
OSEN 손남원 기자
발행 2014.10.24 11: 20

[OSEN=김범석의 사이드미러] 큰돈을 벌고 싶다면 근로와 함께 채찍을 들고 돈한테도 일을 시켜야 한다. 공장이나 임대 건물 같은 생산 수단을 소유하거나 배당주라도 들고 있어야만 부가가치를 창출하며 복리 효과를 누릴 수 있기 때문이다. 회사에서 아무리 뼈 빠지게 일 해도 다람쥐 쳇바퀴인 건 근로 소득을 무참히 앞질러가는 인플레이션 속도를 웬만해선 따라잡지 못하기 때문이다.
 ‘카트’(부지영 감독)는 가진 게 몸뚱이밖에 없는, 그래서 시간과 돈을 바꿔야만 먹고 살 수 있는 대형마트 비정규직들의 처절한 생존권 사수를 그린 눈물겨운 드라마다. 이 영화가 고개를 돌리고 싶을 만큼 잔인한 건 가난의 대물림을 너무도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정규직 전환을 앞둔 엄마는 생존을 위해 악착같이 야근하고, 아들은 편의점에서 유통기한 지난 삼각 김밥으로 끼니를 때운다. 사실상 집에 방치된 미취학 막내딸은 하루 종일 TV만 보며 세상과 꼼짝없이 단절돼 있다.
 엄마가 회사에서 사은품으로 받아왔을 조미김을 달고 사는, 눈에 넣어도 안 아픈 이 귀여운 딸이 엄마의 지긋지긋한 가난을 고스란히 물려받을 걸 생각하니 가슴이 아려왔다. 반에서 단 둘 뿐인 2G폰 사용자인 아들도 급식비가 끊겨 점심을 거르고 제주도 수학여행마저 포기해야 할 처지다. 사실상 SKY 진학이 불가능한 태영이 사회에 진출해 금전적 부가가치를 높일 수 있는 건 불행하게도 로또 아니면 사기 밖에 없다.

 1996년 ‘코르셋’을 필두로 ‘접속’ ‘공동경비구역 JSA’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 ‘마당을 나온 암탉’ 등 등정 보다 남들이 밟지 않은 등로 개척에 일가견을 보여 온 명필름이 이번엔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처절한 생존권에 형광펜을 칠했다. 상업적으로 승산이 낮아 보이는 소재이지만 용기를 냈고, 이 결정이 틀리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결과물을 세상에 내놓았다.
 ‘카트’는 이랜드 계열 대형마트 노동자들의 파업에서 모티브를 빌려왔지만, 근로 현장 어디에서나 벌어지고 있는 첨예한 갑을 전쟁을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흥미롭고 불온하다. 사용자는 어떻게든 노동력을 착취해 잉여 자본을 만들어 배를 불리려 하고, 피고용자는 이에 맞서 정당한 대가를 보장받기 위해 각을 세운다. 하지만 알고 보면 부동산이 집주인 편인 것처럼 이 싸움의 심판관 역시 갑의 판정승을 돕는 조력자일 뿐이다.
 남편의 녹즙기 사업 실패로 5년간 마트 캐셔로 몸이 부서지도록 일해 온 선희(염정아)는 모범사원으로 뽑혀 정규직 전환을 눈앞에 두고 있다. 계약직만 벗어나면 아들의 소원인 스마트폰을 사줄 수 있고 적금도 지금보다 10만원씩 더 부어 반지하를 탈출할 부푼 꿈도 꾸고 있다. 하지만 외국계 회사에 마트가 매각되면서 선희를 포함한 비정규직들이 일방적으로 계약 해지 통보를 받게 되면서 이런 기대는 산산조각 나고 만다.
이대로 쫓겨날 수 없다고 판단한 이들은 난생 처음 노동조합을 결성해 고용 승계를 요구하지만 회사는 무대응과 용역 깡패 동원, 각개 격파와 노노 갈등을 부추기며 이들을 교란한다. 냉정 보다 열정이 앞서게 마련인 순박한 노조원들은 파업 초기, 작은 승리를 경험하지만 이내 회사의 술책에 휘말려 집행부가 무너지고 조합원들도 뿔뿔이 흩어지게 된다. 함께 구호를 외쳤던 동료가 복직돼 내 계산대에 서있는 모습을 목격한 선희는 이제 마지막 벼랑 끝 심정으로 남은 조합원들을 불러 모은다.
 이 영화가 하위 계급의 도식적인 울분과 모순을 그린 노동 영화에서 한 걸음 더 나간 건, 생존이라는 낭떠러지에 아슬아슬하게 매달려있는 사람들의 절박함을 온기어린 시선으로 바라보기 때문이다. 환난상휼이라는 말이 연상될 만큼 서로가 서로에게 희망과 위로가 돼주는 모습이 눈물겹게 펼쳐진다. 대체 인력에게 일터를 빼앗기지 않기 위해 계산대 밑에 박스를 깔고 누워 밀린 수다를 떨고 토막잠을 청하는 이들의 부감샷에선 누구나 콧잔등이 시큰해진다.
 청소원으로 나와 영화의 중량감을 담당한 김영애와 노조 결성을 지휘한 싱글맘 역의 문정희 연기도 흠잡을 데 없지만 ‘카트’의 수훈갑은 단연 염정아다. 자식들에게 양껏 뒷바라지를 못 해주는 궁색한 어미의 뒷모습과 엇나가려는 아들의 뺨을 때린 뒤 남몰래 흐느끼는 장면은 몇 테이크 만에 완성된 신인지 궁금할 만큼 놀라운 몰입이었다.
 영화 촬영 후 한동안 배역에서 빠져나오지 못 했을 것 같은 체화된 감정 연기가 110분 내내 전달됐다. 만약 소극적이던 그녀가 본성을 잃고 영화 후반부 투사가 됐다면 ‘카트’는 실망을 자아내며 길을 잃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염정아는 끝까지 선희의 세밀한 감정선을 부여잡으며 기승전결을 매끄럽게 이끌어갔다. ‘범죄의 재구성’의 구로동 샤론스톤과 MBC 드라마 ‘로열패밀리’에서 이미 진가가 확인됐지만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을 뿐 얼마든지 상업 영화를 책임질 만한 능력자로서의 면모를 보여줬다.
 빼놓으면 섭섭한 또 한 명의 인물이 바로 엑소 도경수다. ‘건축학개론’의 수지, 조정석 발탁에 이어 명필름의 선구안이 연달아 적중하고 있다는 느낌을 확신으로 믿게끔 했다. 의욕이 앞선 신인들에게 흔히 발견되는 오버 액션이나 연기 과잉 없이 표정과 눈빛만으로 감정을 끄집어내는 훈련이 잘 돼 있었다. 이 영화를 앞두고 연기 개인 레슨을 누구에게 얼마나 받았는지 궁금할 정도였다.
페미니즘과 인권 영화에 남다른 애정을 보여 왔던 부지영 감독은 이번에도 역시 차분하면서 할 말은 하고야 마는, 머뭇거리지 않는 연출 태도를 보여줬다. 하지만 상업 영화다운 위트와 농담, 쿠션 캐릭터를 적절히 구사했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은 남는다. 물론 섣불리 조미료를 넣었다가 국물 맛을 완전히 망칠 수 있는 만큼 그녀 역시 많은 망설임이 있었을 것이다. 그럴 때 요긴하게 쓰이는 주방기구가 계량스푼일 텐데 심재명 대표도 ‘에이, 그냥 우리 식대로 합시다’라며 감독에게 힘을 실어준 것 같다. 11월 13일 개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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