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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수의 시대’ 반환점부터 기진맥진해지는 허술한 핏빛 사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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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SEN=김범석의 사이드미러] ‘순수의 시대’를 보면서 다시 한 번 형광펜을 긋게 됐다. 아무리 좋은 식재료라도 레시피가 부실하면 결코 좋은 음식이 될 수 없다는 평범한 흥행 법칙과 ‘7번방의 선물’ 같은 엄청난 히트작을 낸 영화사라도 후속작까지 모두 빼어날 순 없다는 사실이 확인된 따분한 113분이었다.

‘순수의 시대’는 신하균 장혁 투톱의 팩션 사극이지만, 가중치를 따진다면 신하균의 영화에 더 가깝다. 신하균의 출연 비중이 월등할뿐더러 인물의 감정선도 다이내믹하고, 무엇보다 드라마를 끌고 가는 핵심축이 신하균에 몰려있기 때문이다. 조선 초 태조(손병호)로부터 개국공신으로 인정받아 출세 가도를 달리게 된 장군 민재(신하균)는 정도전(이재용)의 사위라는 프리미엄까지 보태지며 승승장구, 마침내 군부를 장악하게 된다.

하지만 권력은 잠시 달콤하고, 달도 차면 언젠가 기우는 법. 사사건건 그를 끌어내리려는 반대파의 견제와 음모가 도사리고, 설상가상으로 태조로부터 세자 책봉을 받지 못한 비운의 왕자 이방원(장혁)도 민재를 탐탁지 않게 여기며 각을 세운다. 둘도 없는 친구이면서도 아슬아슬한 권력 줄타기를 하는 두 남자의 팽팽한 긴장감은 이 영화의 또 다른 관전 포인트다.

그럼에도 ‘순수의 시대’는 두 남자의 거친 파열음 보다 치명적이고 절절한 사랑 이야기를 더 들려주고 싶었던 것 같다. 그러나 결과로만 볼 때 이 선택은 반은 맞고, 반은 빗나갔다. 마치 극중 어린 세자가 왕인 근엄한 아버지가 지켜보는 앞에서 힘껏 활시위를 당기지만 연거푸 과녁을 벗어나 진땀을 흘리는 것처럼.

제작 단계부터 ‘조선시대 판 색,계’로 불린 ‘순수의 시대’는 ‘색,계’와 비슷한 얼개를 갖췄을 뿐 탕웨이의 출세작을 절반도 흉내 내지 못 했다. 드라마는 빈틈이 많고, 에로틱한 베드신도 배우들이 몸을 사려 귀여운 수준이다. 부모의 원수를 갚기 위해 제거 대상인 남자에게 의도적으로 접근해 정보를 캐다가 치명적 사랑에 빠진 여자 스파이의 딜레마와 순애보. 하지만 이 매력적인 캐릭터를 체화하기엔 감독의 연출은 낯가림이 심했고, 신예 강한나의 경력과 내공 역시 여백이 컸다는 느낌이다.

 영화가 중반부터 맥이 풀리는 이유 역시 다름 아닌 이 허술한 플롯 때문이다. 경국지색 급 궁중 기녀 가희(강한나)는 연회장에서 한눈에 민재의 마음을 빼앗게 되고, 마침내 불온한 사랑을 거쳐 그의 첩으로 간택된다. 태조의 명을 받들어 요동 정벌의 대업을 완수해야 할 민재는 당파 싸움과 방원의 견제에 번번이 부딪치며 슬럼프를 겪고, 그때마다 가희를 찾아가 지친 심신을 치유 받으며 점점 그녀에게 중독되기 시작한다.

 마치 ‘색,계’에서 양조위와 탕웨이가 자신들이 만든 덫에 스스로 걸려드는 것처럼, 둘도 거친 섹스와 탐닉을 통해 불우한 결핍과 콤플렉스를 보상받으려 한다. 하지만 그런 몸부림이 격렬해질수록 그들을 감싸는 공기는 허무와 공허함으로 채워질 뿐. 통념과 금기를 뛰어넘는 사랑은 순간 짜릿할지 모르지만, 반드시 처절한 대가와 죄책감, 응징이 뒤따르게 되는데 신분 사회인 조선시대를 배경으로 이런 정서를 효과적으로 구현하는 게 여의치 않았던 것 같다.

가희가 방원과 민재 사이를 은밀히 오가며 인간적인 고뇌에 빠지고 관객이 이를 애틋한 시선으로 바라봐야 영화적 긴장감이 끝까지 유지될 텐데, 감독은 이 지점에서 방심했거나 관객을 지나치게 과대평가한 것 같다. 또 엄마의 원수를 갚겠다는 가희의 원한 구도도 구태의연하고, 무엇보다 이뤄질 수 없는 두 남녀의 가슴 시린 사랑이 효과적으로 전달되지 않는 것도 이 영화의 함정이다. 그렇다보니 엔딩에서 아무리 두 주연 배우 연기에 슬로우 모션을 걸고, 슬픈 배경음악을 깔아도 과잉으로 여겨질 뿐 누선이 자극되지 않는다.

 영화를 보니 왜 CJ 투자1팀이 개봉을 늦췄는지 짐작되지만, 적어도 신하균 장혁의 연기는 많은 단점을 가려준다. 신하균은 뒤늦게 찾아온 사랑과 이를 끝까지 지키기 위해 스스로 지옥행을 택하는 남자의 순수와 야성을 치우치지 않게 잘 표현했다. 활자에 갇혀있던 민재란 인물을 자신의 상상력과 디테일로 완벽하게 창조해 냈다는 느낌이다. 장혁도 과한 발성과 대사 톤이 유감이지만, 아버지로부터 인정받지 못 하는 왕자의 콤플렉스 내면 연기를 미세한 눈동자만으로 섬세하게 보여줬다. ‘블라인드’(11)를 연출한 안상훈 감독의 첫 사극이다. 5일 개봉.
bskim0129@gmail.com
<사진> 영화 포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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