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적의 피아노’ 사교육 1번지 대치동 엄마들이 본다면?
OSEN 손남원 기자
발행 2015.08.29 07: 09

[OSEN=김범석의 사이드미러] 이런 예측 가능한 다큐를 보면서 절대 눈물 따위 소비하지 않겠다고 한 다짐은 불과 10분 만에 속절없이 무너지고 만다. 요즘 세상이 얼마나 복잡하고 영악한데 기껏 피아노를 통해 세상에 맞설 용기와 희망을 품게 되는 시각 장애 소녀의 이야기라니. 여기에 가슴으로 낳은 딸의 음악 공부를 위해 헌신하는 모정은 또 얼마나 진부한 키워드인가.
이 낡은 소재와 안 봐도 비디오이겠다 싶은 뻔한 신파는 그러나 가공하지 않은 날 것의 이야기라는 점에서 오히려 울림이 있고 묵직하게 다가온다. 인위적인 감동을 최소화하기 위해 주인공들이 우는 장면을 모두 걷어냈다는 제작진의 진정성에 오히려 한 방 얻어맞은 것 같은 기분까지 들었다. 안면 공격을 예상해 가드를 바짝 올렸는데 복부를 파고드는 펀치를 가격 당한 뻘쭘함이랄까.
예은이 같은 시각장애자들이 가장 하고 싶어 하는 게 뜀박질이라는 사실을 이번에 알았다. 공터나 학교 운동장에서도 울퉁불퉁한 착지감 때문에 누가 도와줘도 마음껏 뛰지 못한다고 한다. 그래서 예은이가 찾아낸 대안은 건물 계단 오르내리기다. 한 손으로 난간을 잡고 원 없이 뛸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심박 수가 높아진다는 건 살아있음을 가장 쉽고 확실하게 느낄 수 있는 방법인 것이다.

‘기적의 피아노’(임성구 감독)는 예은이가 2007년 SBS ‘스타킹’에 출연해 전국구 스타가 된 뒤의 이야기를 담은 다큐다. 천재 피아니스트 대접을 받던 예은이가 콩쿠르에 떨어진 뒤 피아노를 멀리 했다가 다시 연주와 작곡에 도전하며 희망을 길어 올리는 성장담이다. 여기엔 엄마의 최루성 뒷바라지와 예은이의 천재성을 간파하고 예술적 자질을 끌어내는 놀라운 레슨 선생이 숨어있다.
강호동에게 ‘어머나 세상에’를 연발하게 한 이 기적의 소녀는 작은 동네부터 외국까지 각종 행사에 초청받는 유명인이 된다. 연주 시켜놓고 잡담에 열심인 무례한 청중도 있지만 예은이는 개의치 않는다. 그 순간만큼은 피아노와 하나가 되기 때문이다. 귀에 익숙한 쇼팽이나 모차르트 연주를 주로 들려주지만 그건 팬서비스일 뿐 예은이가 진짜 좋아하는 건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자작곡을 연주할 때다.
예은이 레슨을 맡은 이진욱 피아니스트 역시 없는 형편에 예체능을 전공, 한예종을 졸업한 ‘개룡남’이다. 누구보다 예은이 마음을 헤아려주는 마중물 같은 교사인데 예은이를 가르치며 오히려 자신이 배웠다고 고백한 뒤 제자의 창작곡으로 세종문화회관 무대에까지 올라 협주를 해낸다. 훌륭한 예술가에겐 반드시 위대한 스승이나 영감을 주는 뮤즈가 있게 마련인데 둘 사이가 딱 그랬다.
미술 시간 찰흙을 반죽하며 선생님에게 하마의 잃어버린 눈 얘기를 천연덕스럽게 늘어놓는 예은이가 눈물 주의보 1단계를 발동한다면, 이진욱 교사와 ‘백설공주와 일곱 난쟁이’에 선율을 입혀 즉흥 연탄하는 예은이의 모습은 제법 오랜 기간 잔상에 남을 명장면이다. 간혹 카메라 초점이 안 맞고 핸드 헬드 때문에 화면이 흔들리지만 좀처럼 스크린에서 눈을 떼기 어렵다. 예은이가 갑자기 무슨 말을 하고 어떤 표정을 지을지 궁금해지기 때문이다.
‘기적의 피아노’는 다큐 영화의 한 획을 그을 만큼 경이로운 작품은 아니다. 삶과 죽음이라는 경건함을 경쾌하면서 뚝심 있게 그려낸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 ‘워낭소리’ 만큼 관객을 파고들지도 의문이다. 하지만 적어도 나와 주위를 돌아보게 하는 환기적 측면에선 그 어느 작품에도 밀리지 않는다. 특히 자녀에게 우리보다 덜 혼탁하고 좋은 세상을 선물하고 싶어 하는 부모라면 꼭 손잡고 봐야 할 영화다.
비록 출전료를 주 수입원으로 하는 마이너 콩쿠르에 입선, 용기와 자신감을 회복하는 예은이의 밝은 표정도 좋았지만 좀 더 강렬하고 극적인 반전이 있었다면 어땠을까 아쉬웠다. 하지만 이내 그게 욕심임을 깨닫는다. 악보도 못 보고 낡은 피아노로 연주해 이룬 성과가 서울예고를 목표로 하는 대치동 사교육 시장 아이들을 뛰어넘는다는 것 역시 판타지에 가까운 억지일 것이다. 하긴 정직해야 할 논픽션 다큐까지 거짓 희망과 싸구려 위로에 동참한다면 그게 더 슬픈 일일 것이다. 롯데 배급으로 9월 3일 개봉. '인간극장' 외주 PD가 찍었다. 80분./bskim0129@gmail.com 
'기적의 피아노' 포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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