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리화가’ 보컬 트레이너와 판소리 연습생의 애끊는 러브스토리
OSEN 손남원 기자
발행 2015.11.26 09: 27

[OSEN=김범석의 사이드미러] 어쩌면 산다는 건 끊임없이 자신의 결점을 발견하고 들춰낸 뒤 그것과 싸워나가는 과정인지도 모른다. 한국 영화에서 처음으로 조명하는 조선 최초 여류 소리꾼 이야기 ‘도리화가’(이종필 감독)도 그 험준한 과정을 보여준다. 조선 말 여자는 소리를 할 수 없었던 금기를 깨고 피를 토하는 득음을 거쳐 전국 경연 무대에까지 오른 실존 인물 진채선(배수지)의 스토리다.
어릴 때 고아가 된 채선은 기생집에 위탁되지만 여염집 생활보다 소리에 가슴이 뛴다. 엄마를 잃고 저잣거리에서 우연히 접한 신재효(류승룡)의 구성진 소리를 듣고 난 후부터다. 그날 이후 당대 최고 명창이자 판소리 학당 동리정사의 수장인 재효 눈에 들기 위한 채선의 노력은 눈물겹다 못해 처절할 정도다.
여자는 문하생으로 절대 받을 수 없다는 다그침에 채선은 급기야 남장까지 불사하며 소리를 향한 의지를 굽히지 않는다. 이런 모습에 서서히 마음이 열린 재효는 겉으로는 차갑게 대하지만 그를 남몰래 제자로 인정하기 시작한다. 여성성을 포기하고 폭포 소리를 뚫는 득음과 복식 호흡, 체력 단련으로 채선은 녹초가 되지만 소리꾼이 된다는 사실에 벅찬 나날을 보내게 된다.

‘도리화가’는 ‘광해’(허균) ‘명량’(구루지마)에 이어 세 번째 실존 인물을 연기하는 류승룡 만큼이나 ‘건축학개론’ 수지의 차기작이란 점에서 기대치가 높다. 그러나 전작에서 국민 첫사랑의 아이콘이 된 수지를 발탁한 ‘도리화가’ 제작진의 선택은 결과적으로 반은 맞고, 반은 빗나가게 될 것 같다.
어느 정도 가창이 돼야 하고 무엇보다 미모가 받쳐줘야 한다는 캐스팅의 1차 기준점이 있었겠지만 ‘도리화가’는 수지에게 배우로서 더 괜찮은 가능성과 장점을 뽑아내지 못한 채 어정쩡하게 막을 내린다. 조선 후기 판소리를 집대성한 신재효와 여 제자에 대한 사료가 거의 남아있지 않은 상태에서 제작진은 둘의 멜로를 영화의 한 축으로 활용한다.
문제는 서른 살 넘게 차이가 나는 이 사제지간의 멜로가 그다지 아름답지도 썩 비장하지도 않다는 사실이다. 천신만고 끝에 전국 경연에까지 출전한 채선은 소기의 성과를 얻지만, 그와 동시에 자신이 스승을 연모하고 있었음을 깨닫게 된다. 이 소용돌이 과정에서 사랑의 훼방꾼이 등장하고, 제자를 여자로 받아들여선 안 된다는 주인공의 딜레마가 발생하지만 그다지 애틋하게 전달되지 않는다.
이유가 뭘까? 바로 멜로에 대한 복선과 감정의 점층 구조가 제대로 갖춰지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고된 연습 탓에 의식을 잃고 쓰러진 채선을 정성껏 간호하는 스승을 통해 그 역시 제자를 각별하게 여기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지만, 둘의 복잡 미묘한 심리적 긴장감이 전혀 없다보니 멜로 라인이 전형적으로 다가올 뿐 감정을 이입하긴 역부족이었다.
상업적 코드를 위한 장치이자 자구책이었겠지만 해묵은 멜로 코드 보다 차라리 예술가로서의 치열함에 방점을 찍었다면 좀 더 근사하고 세련된 작품이 나오지 않았을까 싶다. 가령 자신 보다 실력이 출중해지는 제자를 바라봐야 하는 스승의 심경이나 흥선대원군(김남길)이 주최한 낙성연을 둘러싼 궁중 음모와 이를 실력으로 극복해내는 명창의 모습이 더 울림 가득한 카타르시스를 자아내지 않았을까.
류승룡은 전작 ‘손님’에서와 달리 코믹 연기를 자제하며 모처럼 진중한 캐릭터에 집중했다. 1970년생 동갑으로 ‘광해’에서 호흡을 맞춘 이병헌과 12월 극장가에서 맞붙게 됐다. 촬영 기간 스태프들과 노래방에 자주 다녔다는 수지는 화장기 없는 민낯부터 숯을 동원한 남장까지 소화해내며 작품에 대한 열의를 보여줬다.
반사판을 대지 않은 선머슴 같던 채선이 후반부로 갈수록 화사해지는 미모 변천 과정도 빼놓을 수 없는 관람 포인트다. 경복궁 경회루에서 촬영한 낙성연 신이 하이라이트다. tvN ‘응답하라 1988’에 출연중인 이동휘 안재홍 콤비가 채선을 돕는 문하생으로 등장해 자칫 무거울 뻔한 영화에 웃음과 감칠맛을 보탰다. 12세 관람가. 109분.
bskim0129@gmail.com 

Copyright ⓒ OSEN.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