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h!쎈 초점]‘대작 논란’ 조영남은 한국의 앤디 워홀인가
OSEN 손남원 기자
발행 2016.05.25 10: 58

[OSEN=유진모의 취중한담]가수 겸 화가 조영남의 대작 논란이 계속 진행 중이다. 검찰은 조영남 소속사 장모 대표를 소환 조사했고, 조영남도 다시 부를 예정이다. 이 와중에 SBS는 그림을 대신 그려준 송모 화백을 인터뷰했다.
송 화백은 평소 조영남을 형으로 불러온 사이라며 2009년부터 200여 점, 300점은 안 되는 숫자의 그림을 그려줬고, 그에 대한 대가로 점당 딱 10만 원을 받은 것은 아니라고 밝혔다. 뭣보다 중요한 것은 그 그림을 조영남이 팔 줄 몰랐고, 그저 지인들에게 선물하는 정도로만 알았으며 이번 사건으로 인해 그의 삶이 만신창이가 됐다고 울먹인 점이다.
그는 화가다. 그런데 미술계에서 그다지 곱지 않은 시선으로 봐온 조영남의 대작 ‘조수’였고, 그 ‘인건비’로 ‘알바’ 수준의 돈을 받았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그의 작가로서의 명성과 명예와 값어치는 곤두박질쳤다는 의미다.

이번 대작 논란이 불거지자 조영남은 ‘미술계의 관행’이라고 해명했다가 점화원에 물이 아닌 기름을 뿌리는 격이 됐다. 미술계가 반발한 것은 물론 평소 그의 자유분방한 성향에서 해방감의 대리만족을 느꼈던 지지층조차 후안무치하다는 반응을 내놓고 있다.
영화 ‘쎄시봉’이 보여줬듯 그의 정체성의 1번은 가수다. 하지만 그의 히트곡에서 오리지널리티를 찾는 것은 백사장에서 바늘 찾기다. 그의 대표곡이라고 할 ‘화개장터’ 역시 정치인 김한길이 만들었다고 ‘폭로’한 바 있다. 그 외 조영남의 히트곡은 번안곡 아니면 리메이크다.
그의 재산은 사는 집만 100억 원이 넘는다고 하니 추산이 쉽지 않다. 그런데 그는 저작권료를 엄청나게 받는 유명 작곡가라고 할 수 없고, CF 스타도 아니며 설령 찍는다고 할지라도 조용필이나 송중기와는 차원이 다르기에 그런 활동을 통해 큰돈을 벌었다고 추정하기도 힘들다.
결국 그는 가수로서의 각종 출연료가 주요 수입원일 텐데 ‘행사의 여왕’이라던 장윤정도 그런 큰 재산은 모으지 못했으니 결국 그림판매로 재산형성을 주도했다고 추측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2004년 미술전문 월간지 미술세계가 일반인 4915명을 대상으로 미술인에 대한 인지도 현황 조사 결과 그는 ‘아는 화가’ 7위에 오르는 기염을 토한 바 있다.
당시 조사에 참여한 일반인 중 “국내 미술인을 단 한 명도 모른다”고 응답한 사람이 전체의 74%에 달할 정도로 우리나라 사람들의 국내 화가에 대한 관심이 현저하게 낮았다. 조영남의 인지도가 이렇게 놓은 이유는 당연히 그가 인기가수인 덕이었을 것은 명약환화다.
그의 그림 가격이 호(엽서 한 장 크기) 당 50만 원 정도로 유통되는 작품이 보통 1000~3000만 원 정도라는 점 역시 방송출연 등 연예활동이 영향을 끼치지 않았을 리 만무하다.
그의 그림 가격에 대해선 그 누구도 이견을 달기 힘들다. 강제성이 아니라 자연스러운 시장의 흐름에 따라 이뤄지는 만큼 애호가들의 기호에 따른 평가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대작이 관행이란 주장 혹은 변명은 분명히 문제가 있다.
이명옥 사비나미술관장 한국미술관협회장은 한 신문에의 기고를 통해 “관행인가, 아닌가를 판단하려면 현대미술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며 예술가를 창작자형과 연출가형으로 구분했다. 이 회장은 연출가형을 “예술적 관습과 규범을 바꾸고, 예술의 경계를 해체하고, 자유롭게 창조하는 것이 예술이라는 신념을 갖고 있다”고 규정하며 “상업성에서도 자유롭다. 전통적인 창작 방식을 거부하고 공장형 스튜디오에서 작품을 대량생산 방식으로 상품처럼 만들어내기도 한다”고 부연설명했다.
당연히 조영남은 창작자형이 아니므로 연출가형을 대입해야 하는데 문제는 그가 “스스로를 가수와 화가를 합친 ‘화수(畵手)’로 불러달라고 했고, 화투그림이 독창적인 화풍이라고 홍보 마케팅 했다. 그의 그림에 관심을 가졌던 사람들도 아이디어나 콘셉트가 아니라 가수가 그림을 잘 그리는 재능과 실력을 가졌다는 점을 높이 평가했다”고 문제점을 지적했다.
 
이 회장의 표현대로 오래 전부터 대중은 조영남이 노래 잘 부르는 것 이상으로 화투라는 소재를 활용한 크리에이티브로 미술작품을 만들어낸 점을 높이 샀다. 여기까진 큰 문제는 없을 듯하다. 문제는 송 씨가 대신 그림을 그렸다는 2009년부터다. 이전까지 조영남은 화투장을 화폭에 오려 붙이는 콜라주 기법으로 그림을 완성했지만 송 씨가 손을 대면서부터 직접 그리는 형태로 바뀐 것.
그렇다면 이때부턴 조영남은 창작자형이 아닌, 연출가형 즉 기획자로서 기능해야 하는데 그는 이런 사실을 밝히지 않는 미필적 고의에 의한 창작자형 분위기를 조장했고, 진실이 드러나자 ‘관행’이라는 궁색한 변명으로 위기탈출을 시도했지만 꼼수로 그치고 만 것이다.
앤디 워홀은 이미 세상을 뜬 지 오래됐음에도 아직도 미국 팝아트의 선구자로 불린다. 그는 대중미술로 순수미술과의 경계를 무너뜨렸을 뿐만 아니라 영화 광고 디자인 등 시각예술 전반에 걸쳐 혁명적인 변화를 주도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게다가 그는 1960년대 영화 제작과 연출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영화인이기도 하며 언더그라운드의 대표적인 록밴드 벨벳언더그라운드 등과 교류하며 팝뮤직에도 지대한 영향을 끼친 바 있다. 한마디로 전방위에 걸친 예술가고 연예스타였다.
미술가로서의 그 역시 창작자형이 아닌 연출가형이었다. 항상 조수를 두고 작품을 완성했으며 심지어 그는 작업실을 공장이라고 부를 정도로 철저하게 상업성과 악수해왔다.
이런 제작(?)방식이 비난을 받거나 경멸의 대상이 된 적은 있지만 다수의 대중은 그의 작품성이나 도덕성에 대해 쉽게 이견을 제시하지 못했다. 일선에서 활동하는 진보적인 미술가들은 그에 대한 존경심을 표현하는 데 인색하거나 소극적이지 않았고, 그 근거는 워홀 스스로 솔직함과 자신감에 차있었기 때문이다.
그의 활동은 지지자들 입장에선 기성세대가 지키고자 안간힘을 쓰던 전통적인 가치관에 대한 도전이자 혁명이었다. 물론 그는 돈과 명성 등을 드러내놓고 추구하는 자본주의적 상업성의 첨병이긴 했지만 그 수단과 방법이 관습과 관행의 답습이 아닌, 고루한 형식을 깨뜨리는 데 주안점을 둔 파격적이고 기발하며 자유분방함에 주안점을 두고 있기에 크리에이티브를 논할 수준을 넘어선 것이다.
그런 면에선 조영남도 비슷하긴 하다. 평소 자신이 ‘자유로운 영혼’인 것을 드러내놓고 알려온 그는 젊은 여자들과의 교류 연애 ‘썸’ 등에 대해 거리낌 없는 솔직한 생각을 담은 발언을 서슴지 않는 가운데 자신의 운명 때 옆자리를 지켜주는 여자에게 재산의 상당부분을 주겠다는 ‘철부지 발상의 순수한 연애감정과 보은의 의지’의 소신을 피력하곤 했다.
그 발언이 다수의 여성들에겐 불편할 수도 있었겠지만 젊은 미녀들이 나이 많은 갑부와 결혼하는 사례가 비단 할리우드의 얘기만은 아닌 현실을 직시한다면 오히려 조영남이 솔직해서 좋게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한국의 앤디 워홀이 될 뻔했던 조영남은 현재 연예생활 최대의 위기다. 이 대작논란은 그의 그림의 값어치를 폭락시키는 수준을 넘어서 유통 자체에 큰 영향을 끼칠 것은 불을 보듯 뻔하고 사기 혐의라는 법적인 의심과 싸워야 할 상황이다.
오리지널리티를 지닌 가수가 아닌, 연출가형 가수인 그의 활동에 제동이 걸릴 것은 뻔하다. 그는 음원으로 승부하는 가수가 아니라 자신의 존재 자체를 부각시키는 가수이기 때문이다./osenstar@osen.co.kr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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