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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우의 SK랩북] ‘눈물과 믿음’ 최승준은 이렇게 터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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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11월 29일이었다. SK 구단이 전체적으로 바빠지기 시작했다. 프리에이전트(FA) 자격을 얻은 주전 포수 정상호가 LG와 4년 총액 32억 원에 계약했다는 소식이 들린 직후였다. FA 시장에서 이래나 저래나 쓴맛을 봤던 SK지만 정신을 차려야 했다. 최대한 좋은 보상선수를 뽑아 팀의 전력 약화를 최소화해야 한다는 당면과제가 SK를 기다리고 있었다.

다행히 LG로부터 받은 20인 보호선수 외 명단에는 괜찮은 선수들이 있었다. “롯데나 한화보다는 그래도 사정이 낫다”라는 말이 구단 내부에서 흘러나왔다. 때문에 오히려 고민이 더 커졌다. 내년 전력 구성과도 직결되어 있었다. 현장과 프런트가 머리를 맞대며 논의한 끝에, SK가 낸 결론은 우타 거포 유망주 최승준(28)이었다. ‘터지지 않은 유망주’를 선택한 것이다.

‘모 아니면 도’ 최승준을 선택하다

주전 선수들은 대부분 20인 보호선수 명단에 들어가 있다. 이에 많은 팀들은 보상선수를 지명할 때 투수를 지명하거나, 야수의 경우는 1군 백업에서 요긴하게 쓸 수 있는 선수를 택하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최대한 안전한 선택을 하는 것이다. SK도 그런 쪽을 고민했다. 그러나 도박을 걸기로 했다. 장타력은 기대를 모았지만 10년 넘게 터지지 않았던 최승준은 ‘모 아니면 도’였다. 중간이 없었다.

그간 ‘투수의 팀’이었던 SK는 좌우 펜스까지의 거리가 짧은 인천SK행복드림구장의 규격을 최대한 이용하는 ‘장타의 팀’으로 변신을 꾀하고 있었다. 최승준은 그런 구상에 힘을 더해줄 선수였다. 나름대로 자신감도 있었다. 그저 체격이나 힘만 보고 뽑아온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구단 내부의 정보력을 총동원했고, 때로는 구단 바깥의 이야기도 폭넓게 수렴했다. 당시 지명의 결정권자 중 하나였던 민경삼 SK 단장의 말이다.

“최승준은 우리도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선수였다. 지역 출신(동산고) 선수이기 때문에 예전 모습도 기억하고 있었다. 그리고 2군에서 확실한 실적을 보여줬다는 점에 주목했다. 큰 경기장을 쓰는 LG에서는 효용성이 떨어질 수밖에 없지만, 우리의 환경에서는 달라질 수 있다고 생각했다. 구단 바깥 인사들의 이야기도 들었는데 전반적으로 평가가 괜찮았다. 여기에 워낙 심성이 착한 선수라는 점도 주목했다. 성실함이 있어 성공 가능성이 있다고 봤다”

이제 공은 현장으로 넘어왔다. 최승준이 좋은 장타 잠재력에도 불구하고 왜 지금껏 터지지 않았는지, 그리고 이 선수를 어떻게 활용할 것인지에 대한 고민을 해야 했다. 가장 적극적으로 움직인 이는 역시 정경배 타격코치였다. 지난해 트레이드로 영입했던 정의윤을 성공적으로 터뜨린 정 코치는 이제 다음 시선을 최승준에게 두고 있었다.

20년 습관 파괴, 최승준을 바꾸다

면밀하게 관찰한 만큼 SK도 최승준의 단점을 잘 알고 있었다. 민경삼 단장은 “변화구 대처는 어느 정도 되는데, 배트스피드가 빠르지는 않다보니 145㎞가 넘어가는 빠른 공에 약점이 있다고 봤다”라고 했다. 하지만 역발상도 있었다. 민 단장은 “150㎞에 이르는 강속구를 던질 수 있는 투수가 KBO 리그에 몇이나 되겠나. 어차피 타율을 보고 뽑은 게 아니었다. 140㎞ 초·중반의 빠른 공만 대처할 수 있어도 성공이라고 봤다”고 떠올렸다.

보상선수 수준에서 모든 토끼를 다 기대할 수는 없다는 의미였다. 그렇게 좀 더 성공 확률을 높이기 위한 노력이 시작됐다. 플로리다 1차 전지훈련 당시 정경배 코치와 최승준이 고민을 시작했다. 핵심은 간결함이었다. 중심이동·테이크백 모션·타격 타이밍과 포인트 조준이 물 흐르듯 이어질 수 있도록 자세를 수정했다. 방망이를 꽉 잡던 습관도 고쳤다. 말이 쉽지, 20년간 한 폼으로 타격을 해왔던 최승준에는 선수 생명을 건 모험이었다.

“정의윤도 그렇고, 최승준도 그렇고 몇 년간 성적이 나지 않은 선수였다. 서로 합의 하에 새로운 폼으로 바꿔보려는 시도를 했다. 수정하려고 승준이도 부단히 노력을 했다. 캠프 때와 시범경기 때까지도 좋았다. 시범경기에 삼진을 많이 당해도 좋아지고 있었기 때문에 모두가 괜찮다고 했지 아무도 뭐라고 하지 않았다. 선수가 폼이나 스윙을 바꾸는 건 쉽지 않다. 최소 6개월은 해보고 그래도 안 되면 1년까지만 보자고 했었다” 정경배 코치의 말이다.

최승준도 이에 대해 만족스러워했다. 최승준은 오키나와 2차 전지훈련을 떠날 당시 새로운 타격폼에 대한 만족감을 드러냈다. 같은 힘을 줘도 타구도 더 멀리 날아가고, 그 전까지 느꼈던 분절감도 사라졌다고 말했다. 얼굴에 흐르는 미소는 자신감을 대변하고 있었다. 장타력은 이미 플로리다를 강타한 터였다. 그렇게 최승준은 앞으로 나갈 일만 남은 것 같았다. 하지만 고비는 있었다.

질책과 눈물, 최승준을 깨우다

오키나와 연습경기까지 승승장구하던 최승준은 막상 시범경기에 들어가서 성적이 좋지 않았다. 15경기에서 타율은 1할(40타수 4안타)에 불과했다. 여기에 삼진만 25개였다. ‘시범경기 삼진왕’이라는 불명예가 붙었다. 팀에서는 눈치를 주는 사람이 없었지만, 스스로가 급해졌다. 시즌 초반까지도 여파가 이어져 결국 제 스윙을 하지 못한 채 2군에 내려갔다.

억울했고, 또 자신을 위해 희생한 모든 사람들에게 미안했다. 민 단장은 “2군에 내려갈 때 정경배 코치를 잡고 눈물을 보였다고 하더라. 그만큼 심성이 착한 선수고, 열심히 했다는 점에서 구단 관계자들도 아쉬워했다”고 이야기했다. 급해진 최승준은 여기서 악수를 뒀다. 최승준은 “하도 맞지 않다 보니 예전 폼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상의는 없었다. 독단적인 결정이었다”라고 담담하게 이야기했다.

이런 최승준을 보고 가장 화를 낸 것은 정경배 코치였다. 조금만 더 가면 고지가 있는데, 당장의 성적에 다시 예전으로 돌아가 버린 제자가 안타까웠다. 하지만 강요하기는 어려운 일이었다. 어디까지나 마지막 결정은 선수가 내려야 했다. 정 코치는 “1군에 온 뒤 며칠은 그냥 가만히 내버려뒀다. 어차피 선수 마음이 거기(예전 타격폼)로 가 있는 것 아니다. 그래서 ‘그렇게 해보고 잘 안 되면 시즌 끝나고 다시 해보자’라고 말하고 내버려뒀다”고 했다. 아쉬움에 속이 끓었지만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최승준이 금세 정 코치를 찾은 것이었다. “캠프 때 폼을 다시 찾게 해달라”라고 부탁했다. 이는 결정적인 분수령이 된 5월 18일 인천 롯데전으로 이어졌다. 당시 최승준은 조시 린드블럼을 상대로 역전 만루포를 때렸다. 팀 승리에도 기여했지만 꽉 막혀 있던 혈을 뚫은 홈런이라 개인적으로도 의미가 컸다. 최승준이 올해 때린 14개의 홈런 중 가장 귀하게 여기는 홈런이기도 하다. 최승준은 마음을 고쳐먹게 된 계기가 모두 정 코치 때문이었다고 말한다.

“코치님이 처음에는 ‘11년의 무명 생활도 참았는데 왜 6개월을 못 참나’라고 화를 내시다가 나중에는 ‘폼을 바꾼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닌데 코치로서 신뢰를 주기 전에 폼을 바꾸려했던 내 탓이다’고 하시더라. 그렇게 자책하시니 더 마음이 아팠다. 그 때 코치님과 함께 지금까지 해왔던 과정들이 다시 한 번 뇌리를 스쳐갔다. ‘이러면 안 되겠다’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 후로 최승준의 야구인생 역전은 모두가 잘 알고 있다. 최승준은 30일까지 총 15개의 홈런을 때려 팀 내 홈런 공동 2위(정의윤 16개·최정 15개)에 올라 있다. 타석당 홈런으로만 따지면 리그 최고의 성적이다. 6월에만 11개의 홈런을 때렸고 25개의 타점을 몰아쳤다. 출루율과 장타율의 합인 OPS는 리그 최고다. 리그 월간 최우수선수(MVP)에도 도전할 만한 성적이다.

격려와 믿음, 최승준을 춤추게 하다

김용희 SK 감독은 이미 시범경기에 들어가기 전 사실상 팀 라인업의 뼈대를 다 짰다. 최승준은 8번 지명타자였다. 정확성은 다소 떨어지겠지만, 담장을 넘길 수 있는 장타력을 가진 선수가 하위타순에 배치되면 그만큼 상대 마운드를 압박할 수 있는 효과가 있다. 또한 현역 시절 강타자였던 김 감독은 누구보다 최승준의 가능성을 믿고 있었던 지도자이기도 했다.

그런 김 감독은 시범경기 부진에도 불구하고 최승준을 끝까지 밀어붙였다. 심지어 “양아들이냐”라는 비아냥까지 나왔지만, 김 감독이 최승준 대신 모든 비난을 짊어지고 갔다. 무엇보다 자신이 구상하는 공격 야구를 구현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한 선수였다. 2군에서 성적이 썩 좋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최승준의 전격 콜업을 지시한 것도 김 감독이었다. 숱한 비난에도 흔들리지 않은 그 뚝심이 결과적으로 최승준을 깨웠다. 결정권자인 감독의 선구안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잘 보여주는 상징적 사례다.

최승준은 “매번 타석에서 삼진을 당했는데도 감독님은 아무 말도 안 하셨다. 오히려 ‘홈런 타자는 원래 삼진을 많이 당하는 법’이라며 끝까지 믿고 기용해주셨다”면서 “그렇게 나를 믿어주시는 감독님의 기대에 부응하고자 더욱 열심히 노력했다. 앞으로도 계속 이 컨디션을 유지해서 팀과 감독님께 은혜를 갚고 싶다”고 힘줘 말했다.

정경배 코치는 “지금은 어느 정도 잘 치고 있으나 시간이 지나면 다시 삼진을 당하거나 홈런을 치지 못할 때가 올 수도 있다. 꾸준하게 훈련해서 본인의 것으로 만드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라고 강조했다. 아직은 폭죽을 터뜨리기 이르다는 것이다. 민 단장도 “지금까지의 활약상만으로도 기대 이상이다. 이 페이스가 시즌 내내 이어지는 것을 바라는 건 욕심이다. 분명 고비도 오고, 힘든 시기도 올 것이다”고 이야기했다.

그러나 최승준은 두 가지 기억을 공유하고 있다는 점에서 예전의 최승준과는 다르다. 무엇보다 난생 처음으로 좋았을 때의 기억이 생겼다. 정 코치는 “자신감이 생기니 타석에서도 타이밍·출루율·변화구와 직구 대처 등 여러 부분에서 여유가 생기고 달라졌다”고 대견해 했다. 한 번 잘했던 기억이 있는 만큼 안 좋을 때도 그 기억을 떠올리며 보완점을 찾아갈 수 있다. 이는 선수 경력에 있어 큰 전환점이 될 수 있다.

또 하나의 기억은 항상 자신의 곁에서 힘이 되어주는 사람들에 대한 미안함으로 무장했다는 것이다. 힘든 시기에 정 코치와 동료들의 전화는 큰 도움이 됐다. 정의윤은 배팅 장갑 2개를 최승준에게 주며 “낙심하지 말고 열심히 해라. 이 장갑이 찢어질 때까지 하고 와라”고 격려했다. 시범경기 부진 당시 룸메이트인 동기 이명기는 최승준의 기분에 행여 방해라도 될까봐 쥐 죽은 듯이 살았다. 김상용 퓨처스팀 컨디셔닝 코치는 최승준을 졸졸 따라다니며 몸 관리와 치료를 해줬다. 최승준은 이를 생각하며 오늘도 이를 악물고 있다.

“최근 꿈같은 날들이 이어지고 있는데 모든 사람들이 나를 믿어주고 끝까지 이끌어주지 않았다면 이런 성적은 꿈도 꾸지 못했을 것이다. 다들 마음고생이 심했을 텐데, 최근에 좋은 결과가 있어 다행이다. 늘 감사한 마음이고 앞으로 더욱 발전하는 모습으로 보답하고 싶다”

한 선수가 세상에서 빛을 보기까지는 이처럼 많은 이들의 노력과 배려가 필요했다. 그냥 어느 순간 떨어진 것이 아니었다. 물론 성공이라고 평가하기에는 너무 이른 시점이다. 그러나 이제 막 발을 내딛은 최승준은 물론, SK의 육성 시스템에도 추후 참고할 만한 좋은 스크랩북이 생긴 것만은 분명하다. /SK 담당기자 skullboy@ose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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