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h! 시네마]아수라’, 문제적 기시감의 핏빛 누아르
OSEN 손남원 기자
발행 2016.09.23 07: 45

[OSEN=유진모의 취중한담]영화 ‘아수라’(김성수 감독, CJ엔터테인먼트 배급)는 캐스팅만 놓고 본다면 단연 올해 최고의 화제작이다. 송강호와 어깨를 나란히 한다고 해도 이의를 제기할 이가 별로 없을 흥행과 연기력의 보증수표 황정민을 비롯해 신비주의의 대명사 정우성, ‘곡성’으로 주연 자리를 꿰찬 곽도원이 주인공이고, 주지훈 정만식이 조연이며, 윤제문이 우정출연이다.
영화는 여러 면에서 기존의 틀에 박힌 이분법적 구조를 붕괴하는 데 노력을 기울였다. 선인과 악인, 정의와 부조리의 틀 안에서의 권선징악, 혹은 정의구현이 고정된 정형을 무시한 채 오로지 누아르라는 장르적 분위기에 몰두한다.

무대는 재개발을 앞둔 가상의 도시 안남 시. 시장 박성배(황정민)는 공직선거법 위반으로 기소돼 유죄 선고를 받지만 항소를 통해 가까스로 시장 직을 유지한 뒤 불법 부동산개발에 본격적인 박차를 가하기 시작한다. 그는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살인교사까지도 서슴지 않는 악인 중의 악인이지만 대중 앞에선 교활한 연기를 통해 올바른 공직자로서의 이미지를 쌓는 데 선수다.
그의 온갖 뒤치다꺼리를 해주는 인물은 형사 한도경(정우성)이다. 가망 없는 투병으로 엄청난 치료비가 들어가는 아내를 위해서인데 그녀는 성배의 여동생이다. 범죄자들을 동원해 폭력과 살인, 증거조작 등 각종 범죄에 앞장서며 괴물이 돼가던 도경은 성배를 노리는 수원지검 특수부 검사 김차인(곽도원)의 덫에 걸려든다. 곧바로 옷을 벗고 성배의 수족 역할을 하려던 그는 차인의 압박에 잠시 주춤한 채 일단 후배 형사 문선모(주지훈)를 성배에게 보낸다.
의외로 차인의 수사는 치밀했다. 각종 증거자료로 자신을 옭죄자 도경은 갈등한다. 처음엔 의리와 생존을 위해 성배를 지키고자 했으나 다른 여자와의 성관계 장면과 동료형사 살인 장면을 차인이 들이대자 성배를 잡아들일 결정적인 증거를 확보하는 데 적극적으로 협조하기 시작한다. 과연 성배와 차인 중 누가 이길 것인가? 도경은 어느 편에 설 것인가?
아수라는 축생계와 인간계 사이의 싸움의 신이었지만 불교에 귀의해 불법을 지키는 신이 된 중생으로 그가 사는 세계는 다툼의 공간이다. 얼핏 홍콩 누아르의 수작 ‘무간도’가 연상된다. 역시 불교용어 무간지옥에서 따온 제목이다.
플롯은 나름대로 쫀쫀하다. 각 인물들은 개연성을 갖췄고 설득력을 줄 수 있을 만큼 각자의 의식과 목적에 충실하게 산다. 자신의 머리에 상해를 가장한 자해를 스스럼없이 해대는 언론플레이로 동정표를 얻고, 자신의 팔을 자를 듯한 기세등등한 모습으로 한 치의 빈틈도 안 보이는 적을 제압하는 성배는 확실히 기억될 만한 캐릭터다. 폭력조직 두목보다 더 강단이 있고, 검사보다 더 법을 잘 알며, 마약중독자보다 더 무식한 행동을 강행군하는 이 극단의 인물은 황정민이라는 그릇을 만남으로써 엄청난 존재감을 지닌 거인으로 확실하게 구현된다.
‘신세계’의 출세형 검사와 ‘곡성’의 순진무구한 시골경찰에 이어 또 집요한 검사 역을 맡은 곽도원은 이제 검사 역만큼은 최고의 전문배우라 해도 손색이 없을 명연기를 보여준다.
“미치도록 잡고 싶었다”는 영화 ‘살인의 추억’의 송강호의 대사는 경찰과 검사의 존재의 이유를 설명하는 최고의 카피다. 경찰과 검사는 범죄자를 잡고 싶고, 감옥에 처넣고 싶어 한다. 당연한 공무원으로서의 의무이자 책임이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정의감이나 공명심보단 직업적 특성이 왕왕 앞선다. 물론 거기엔 전시형 의욕과 더불어 출세욕이 개입되기 마련이다.
‘신세계’의 검사가 그랬듯 ‘아수라’의 차인 역시 마찬가지다. 처음엔 부장검사에게 자신의 쓸모를 입증하고 싶어서, 그래서 출세하고 싶어서 차인을 잡고자 이를 갈았지만 막판에 보여주는 그의 ‘인간적’인 모습은 그냥 살고자 하는 사람이었다. 도경에게 반말과 존댓말을, 회유와 폭행과 압박을 병행하는, 능구렁이 찜 쪄 먹을 만큼 능글능글한 검사 캐릭터는 곽도원으로 시작해 곽도원으로 진행 중이다.
정우성이 직접 참여했다는 카 체이싱 장면은 대미를 장식하는 장례식장 혈투 장면과 더불어 이 영화의 가장 빛나는 비주얼이다. 빗속의 위험천만한 차량질주와 추돌 등은 보는 이의 손에 땀을 쥐게 만든다. 장례식장의 피가 난자한 마지막 시퀀스는 영화의 제목과 딱 들어맞는다.
하지만 거기까지다. 가장 튀어야 할 카 체이싱 신은 스토리 전개를 설명하는 데 반드시 필요하긴 하지만 동기가 되는 도경의 극에 치달은 분노의 이유가 불분명하다. 마치 ‘라이터를 켜라’에서 허봉구(김승우)가 라이터 하나 때문에 무모하게 폭력조직 두목 양철곤(차승원)에게 지겹도록 대드는 장면이 연상될 정도다.
특히 아쉬운 캐릭터는 바로 주인공 도경, 혹은 정우성이다. 1994년 ‘구미호’로 데뷔한 이래 20여 편의 한국과 중국 영화에 출연한 그이지만 대표작이라야 송강호와 이병헌의 도움을 받은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과 ‘감시자들’이라는 게 납득이 될 정도다. 흥행이 필모그래피의 전부는 아니지만 매우 중요한 것은 사실이다. 여기에 화제성과 수상 이력 등의 작품성이 덧붙어 배우의 무게를 완성된다. 하지만 정우성은 작품성이나 의의에서 극찬을 받은 작품에 출연한 적도, 그런 눈부신 연기력을 펼쳤다는 칭찬을 받은 적도 언제인지 희미하다.
이번의 도경 역시 그 한계에서 맴돈다. 도경은 스스로 비리형사의 길을 택했고, 거리낌 없이 성배의 개 노릇을 해왔다. 동료 형사를 죽이고도 방금 전까지 한편이었던 조력자에게 눈 하나 깜박거리지 않고 죄를 뒤집어씌울 정도로 임기응변과 권모술수에도 능한 인물이다. 그런데 갑자기 자신보다 더 광기에 휩싸인 선모에게 정신 차리라고 외친다. 성배를 믿지 말라고 살천스럽게 부르댄다. 그러면서도 그는 성배의 그늘과 차인의 올가미 어느 한 곳에서도 벗어나지 못하고 방랑한다. 정우성의 연기는 무르익은 것은 맞지만 방향성이 일관되는 게 한계다. 어느 배역을 받아도 비슷하다. 지나치게 올바른 이미지와 완벽한 용모 ‘탓’이다.
‘아수라’는 ‘밀정’과 ‘무간도’부터 멀게는 ‘베테랑’과 ‘짝패’까지 기시감을 준다. 도경은 청렴결백한 공무원으로 살고자 하는 강력한 의지를 가진 경찰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악한 사람은 더더욱 아니다. 그냥 손위 처남을 돕고자, 그럼으로써 박봉의 공무원으로선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아내의 치료비를 대고자 성배의 악행을 도와주다보니 악인이 됐을 따름이다.
그런 그를 차인이 어르고 달래자 헷갈리기 시작하고 그건 자신보다 더 착했으나 이제 더 잔인한 악마가 된 선모의 무한질주에 대한 제동의 노력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자신은 정체성의 혼란을 겪는다. 성배에게 붙어야 할지, 차인에게 붙어야 할지 혼돈에 빠지는 것이다. ‘밀정’의 명토 박을 수 없는 인물 이정출(송강호)이다.
도경은 경찰인지, 건달인지 모호한 인물이다. 그건 자신의 상관(윤제문) 역시 마찬가지다. 살인혐의 피의자를 검거할 생각은 안 하고 그가 챙긴 거액의 ‘인건비’를 빼앗는 데 혈안이 돼 있다. 누가 경찰이고, 누가 조폭인지 모르는 세상은 ‘무간도’다.
성배는 그동안의 누아르가 그려온 전형적인 비리의 지도층이다. ‘베테랑’의 조태오(유아인), ‘내부자들’의 여당 대통령 후보, 보수언론의 실세, 재벌 총수 등과 다름없다. 그리고 신도시의 개발 이권을 둘러싼 설정은 ‘짝패’다. 영화는 극단적인 지성적 누아르를 추구하느라 불온한 핏빛 데카당스로 얼룩졌다. 132분. 청소년 관람 불가. 9월 28일 개봉./osenstar@osen.co.kr
[칼럼니스트]
<사진> '아수라' 스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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