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 맛집에 '맛집'이 병들어 간다
OSEN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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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SEN=손남원의 연예산책] 서울 마포 용문동의 한 허름한 국숫집. 가파른 언덕길 초입의 2평 남짓 가건물에 간판조차 없어서 마치 조그만 포장마차를 연상케하는 곳이다. 이 국숫집의 단골은 인근 공장지대 근로자와 동네 어르신들이 대부분이다. 메뉴라고는 잔치국수와 비빔국수, 달랑 두 개뿐. 가격도 보통이나 곱배기 모두 3000원으로 똑같지만 양만큼은 큰 사발 하나에 넘칠 정도로 담아내는 푸짐한 인심이다. 실내에는 주인 할머니가 홀로 서서 작업하는 1평 주방과 빙 둘러 밖을 내다보는 좌석 대여섯 개가 고작이고 가게 외벽을 따라 벽붙이식 간이 식탁이 둘러져 있다. 주문을 받고 바로 면을 삶아내는 할머니의 작업 방식으로는 몰려드는 손님을 감당하기 힘들지만 그동안 아는 이들끼리 주로 찾는 동네 값싼 맛집이었기에 그런 고민을 할 이유도 없었다. 그러나 TV 맛 프로에 소개되고 몇몇 신문이 뒤따라 이 곳을 잔치국수 명가로 보도하면서 사정은 180도 달라졌다. 먼저 할머니 인상이 뒤틀리는 중이다. 손님이 늘었다고 좋아하는 게 아니라 "내지 말랬더니 내가지고 힘들어 죽겠다"는 푸념을 연신 뱉고 있다. 이 곳을 찾던 단골들은 더이상 제 시간에 3000원 짜리 푸짐한 국수로 허기를 면하기 힘들어졌다. '인터넷에서 이 집을 찾아냈다'고 히히덕 거리며 할머니에게 주차할 곳을 묻는 모피 코트 아줌마들. 신문이나 방송을 보고서 아이들을 데리고 온 중년 부모와 국수 한 그릇 시켜놓고 둘이 나눠먹으며 마냥 행복한 연인. 카메라와 노트북으로 중무장한 전문 식객(?)들이 줄서고 꽉 들어찬 국숫집은 더이상 서민의 공간으로 자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오랜만에 이같은 분위기에 휩싸여 어렵게 받아든 할머니의 국수는 면발이 불고 국물은 식어서 예전 맛이 아니었다. 주문 후 몇 분이면 뚝딱 차려지던 국수를 20분 넘게 기다려서 겨우 받아든 것이나 문 밖에 줄지어 선 대기자들 눈총에 후다닥 그 큰 그릇을 비우는 조급함도 그렇고. 무엇보다 적당히 벌어 적당히 베풀자던 할머니의 얼굴에서 정겹던 미소가 사라진 게 아쉽다. "생각보다 맛이 없다" "TV에 소개된 맛집이 그렇지 뭐"라는 낯선 이들의 수군거림에 상처받을 그 모습이 안쓰럽기 그지없다. 3000원 잔치국수가 맛 있으면 얼마나 맛 있을까. 배고픔이 가장 맛있는 반찬이라지 않았던가. 할머니의 국수는 주머니 가벼운 동네 공장 직원들과 어르신들의 주린 배를 따뜻하게 채워주는 그 맛이 일품이었던 게다. 전국 최고 수준의 잔치국수를 판다는 소개 기사가 이같은 속사정을 제대로 전해주지 못한 탓에 일부러 먼 곳에서 왔다는 식객들이 괜한 불평을 텋어놓아 할머니를 골탕먹이는 것이다. TV 속 맛집 소개는 2000년대 들어 열풍처럼 번지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역기능 보다 순기능이 강조됐고 많은 시청자들에게 좋은 맛집 정보를 알렸다. 하지만 수년 전부터 맛 소개 프로그램이 급증하고 더이상 발굴할 맛집 자원이 고갈되면서 음식점 광고를 방불케하는 전파 낭비가 계속되고 있다. 특히 할머니의 잔치국숫집처럼, 오붓한 분위기의 동네 맛집들이 TV에 소개되면서 제 모습을 잃어가는 부작용들도 곧잘 눈에 띄는 중이다. 요즘 TV 맛집 소개는 중용의 묘가 필요하지 않을까 싶다. [엔터테인먼트팀 부장]mcgwire@ose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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