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프로야구 난투사](3)사상 최악의 잠실구장 관중 난동
OSEN 홍윤표 기자
발행 2013.01.18 15: 25

1990년 8월 26일 밤, 잠실구장은 ‘해방구’였다
1982년 프로야구 출범 이래 관중 난동은 여러 차례 일어났지만 그 가운데 대구 관중의 해태구단 버스 방화사건(1986년 10월 22일 한국시리즈 3차전, 대구구장)과 잠실구장 해태 팬 난입사건(1990년 8월 26일 해태-LG전, 잠실구장) 두 건이 소요의 규모면이나 난폭성에서 가장 큰 사태였다고 할 수 있다. 두 사건은 모두 밤중에 일어난 공통점이 있다.
특히 잠실구장 난동은 원정팀 응원 관중에 의해 사건이 촉발됐고, 심판 판정이나 응원팀의 졸렬한 플레이 등에 자극 받은 것이 아닌, 뚜렷한 원인을 찾기 어려운 집단 난동이었다는 점에서 한국 프로야구계에 경종을 울린 것은 물론 사회 문제로 비화됐던 대형 사건이었다.

잠실구장 난동사태를 짚어보기에 앞서 1990년 프로야구 판의 흐름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난동의 소용돌이에 휘말렸던 해태 타이거즈는 1989년에 전무후무한 한국시리즈 4연패를 일궈냈던 터여서 호남 팬들의 눈높이가 한껏 올라가 있었다. 우승을 당연시하는 분위기였지만, 그해는 선동렬이 버티고 있었음에도 마운드가 부실, 초반부터 고전을 면치 못해 중하위권을 오락가락했다. 해태는 8월 들어서야 치고 올라가기 시작, 8월 25일 현재 47승 3무 41패로 4강권에 들어 있었다.
반면 LG 트윈스는 1989년 시즌 후 MBC 청룡을 인수, 창단해 만년 중하위권에서 벗어나려고 몸부림치던 시기였고, 백인천 감독을 영입해 4, 5월에 바닥권에서 헤매다 6월부터 급상승세를 타며 상위권으로 도약, 8월 25일까지 53승 42패로 선두에 올라 있었다. 치열한 4강 다툼이 전개되고 있던 무렵인 8월 26일에 일은 터졌다.
해태와 LG 두 팀은 새로운 라이벌로 떠올라 그 무렵 잠실구장에서 열린 두 팀의 주말 경기는 연일 ‘만원사례’를 내걸어야 할 판이었다. 8월 24일부터 3연전을 치른 해태와 LG는 25일에 이어 시즌 양 팀 간 마지막 경기인 26일에도 3만 100명의 관중이 운집한 가운데 힘겨루기에 들어갔다. 경기시작은 오후 6시 반부터였으나 팬들이 매표(오후 3시) 훨씬 전인 오전 11시께부터 매표구 앞에서 북새통을 이루었고, 섭씨 32도의 땡볕에서 시달렸다.
경기는 5회까지는 양 팀 선발 신동수(해태)와 김용수(LG)의 호투로 팽팽하게 전개됐다. 하지만 6회에 3점을 뽑은 LG가 7회에 대량 7득점, 승부의 저울추가 완전히 기울었다.
8회 초 해태가 공격을 시작하기 전인 밤 9시 12분께, 3루 측 해태 응원관중들이 그라운드로 뛰어들기 시작, 삽시간에 500여 명의 관중들이 떼 지어 그라운드를 점거했다. 관중들은 그라운드 안에서 술판을 벌이는가 하면 일부는 베이스와 외야 펜스 광고부착물도 떼 냈고 불까지 질렀다. 그 와중에 1루 쪽 LG 응원 관중 한 명이 뛰어내려와 철제 의자로 해태 응원 관중의 머리를 내려친 것을 신호로 양 쪽 관중이 서로 뒤엉켜 그라운드 안팎에서 패싸움이 벌어졌다. 빈 병이나 깡통에 얻어맞은 부상자도 속출했다.
해태 측 관중들은 그라운드 안에서, LG 쪽 관중들은 스탠드에서 오물을 마구 던져댔고 관중석 의자에 불을 지르기도 했다. 한바탕 광란이 휩쓸고 간 경기장은 말그대로 아수라장이었다. 마치 전쟁터의 폐허를 방불케 했다. 3루 쪽 관중석 의자 등받이가 100여개 파손되는 등 기물 파손도 곳곳에서 벌어졌다.
경찰의 과잉 진압과 늑장 출동도 소요를 더욱 부채질한 측면이 있었다. 7회 말 LG 공격이 끝난 다음 술에 취한 해태 응원 관중이 그라운드에 뛰어들자 이를 제지하던 20명  가량의 경찰이 곤봉으로 구타, 야유와 오물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난지도’ 쓰레기장처럼 돌변한 잠실구장에서 그날 3만여 관중이 버린 쓰레기만 8톤 트럭 5대분이나 됐다.   
그날 난동은 경기중단 36분이 지난 밤 9시 46분께 무장경찰 3개 중대가 투입돼 그라운드의 관중들을 내몰아 가까스로 수습됐다. 경기는 1시간 7분간 중단 됐다가 밤 10시 19분에 속개돼 13-1로 LG가 이기고 밤 10시 30분에야 끝났다. 해태는 LG에 지는 바람에 승차가 3.5게임으로 벌어졌다.
관중 난동을 피해 덕아웃 뒤 라커룸에서 대기하고 있던 백인천 감독은 “할 말이 없다. 프로야구를 사랑하는 마음이 있다면 그 애정을 아름답게 쏟아냈으면 하는 바람이다. LG 팬들에게도 간곡히 부탁드린다.”며 씁쓸한 표장을 감추지 못했다.
경기 후 김응룡 감독은 큰 충격을 받은 탓인지 “해태 감독을 그만둬야할까 보다.”면서 “내 책임이 크다. 해태를 사랑하는 팬들을 위해 이겨줘야 하는데…. 해태를 사랑하는 마음을 이런 식으로 표현하다니 부끄럽다. 팬들이 다음경기를 위해 승부가 기운 상황에서 2진급 투수를 내보내야 하는 어려움을 이해해 주길 바란다.”고 이례적으로 길게 말했다.
해태 관중들의 난동은 그해 들어서는 그날이 처음 있는 일이었다. 굳이 난동의 빌미를 찾자면, 승부가 사실상 결판이 난 뒤 김응룡 감독이 7회 말에 2진급 투수였던 강태원-최향남을 등판시켰다는 것 정도였다. 거슬러 올라가 보면 해태가 0-3으로 뒤져있던 6회 말에 3번째 투수로 내보냈던 김정수가 신언호의 타구에 오른쪽 허벅지에 맞고 강판된 다음 김응룡 감독이 주전 투수들의 고갈로 7회에 어쩔 수 없이 신인급 투수들을 내보내 대량 실점했던 것이다.
경기를 마친 해태 선수단은 27일 새벽 광주로 내려갔다. 구단 버스 안의 분위기는 침울했다. 김응룡 감독은 “난동자들에게 미안한 생각은 없다. 다만 묵묵히 해태를 아끼고 사랑해주는 대다수 팬들을 위해 앞으로 남은 경기에서 총력을 기울여 좋은 성적을 올리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선임자인 김성한은 “이길 때 환호하는 팬보다 졌을 때 격려의 박수를 보내주는 해태 팬이 많아야 선수들도 더욱 분발할 수 있다. 다시는 잠실구장 불상사와 같은 일이 일어나지 말아야 한다”고 언급했다.
관중난동의 후폭풍은 거셌다. 당시 노태우 대통령은 27일 경기장 폭력사태 근절을 안응모 내무부 장관에게 지시했고, 김기춘 검찰총장과 이종국 치안본부장도 경기장 내 폭력행위 엄단과 주동자 전원 구속 방침을 전국 검찰과 경찰에 내리기도 했다. 잠실구장 관할 강남경찰서는 난동에 가담한 사람들은 모두 검거, 형사 처벌한다는 방침을 세우고 현장에서 연행한 난동자들 가운데 19명을 28일에 폭력행위 등 처벌에 관한 법률위반 및 업무방해 혐의로 구속영장을 신청했다.
결국 경기장 난동자들에게 첫 실형이 선고됐다. 서울형사지법은 10월 31일 잠실구장 폭력 사태에 연루돼 구속돼 있던 11명의 관중들에게 징역 1년 6월~1년에 집행유예 2년씩을 선고하고 석방했다. 선고공판에서 이들이 집행유예로 풀려나긴 했지만 경기장 난동 관중에게 중형을 내린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한편 한국야구위원회(KBO)는 프로야구 난동 방지 묘책 찾기에 골몰하다가 1991년부터 각 구장에 지정좌석제를 도입하는 안을 내놓았다. 당시만 하더라도 이미 메이저리그나 일본 프로야구에서 정착이 된 지정좌석제가 장내 질서유지나 혼잡을 줄이는데 도움이 될 것으로 본 것이다. 그날 난동은 일본 신문이 ‘한국 프로야구 팬 500명이 폭동’이라는 제하에 대대적으로 보도하는 등 외신에도 크게 나 밖으로도 망신살이 뻗쳤다.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에 올라탄 관중들. 그 시절, 어느 구단 할 것없이 일부 몰지각한 관중들은 응원하는 팀이 부진하면 툭하면 노상 감독 청문회를 열었고, 구단 버스에 돌을 던지거나 심지어 방화를 하는 등 가학적인 성향으로 악명이 높았다. 일각에서는 관중들의 도를 넘어선 집단 난동을 정치, 사회적인 불만의 표출로 해석하기도 했다.
/홍윤표 OSEN 선임기자
 일간스포츠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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