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프로야구 난투사](4)대구 관중들, 해태 구단버스 ‘보복 방화’ 난동
OSEN 홍윤표 기자
발행 2013.01.24 07: 30

삼성 라이온즈는 1982년 프로야구 출범 때부터 이른바 야구 우등생들을 대거 확보, 가장 강력한 전력을 갖추었지만 이상하리만치 한국시리즈에 올라만 가면 맥을 추지 못했다.
첫 해인 1982년에는 OB 베어스에 1승 1무 4패로 막혔고, 1984년에는 상대로 골라잡았던 롯데 자이언츠 최동원의 벽을 넘지 못하고 3승 4패로 무릎 꿇었다.
삼성 구단은 1985년에는 초장부터 전력질주, 아예 전후기 통합 1위를 달성해 한국시리즈 자체가 무산됐다. 그에 대해서도 칭송 대신 시리즈 무산에 대한 아쉬움이 컸던 나머지 오히려 부정적인 여론이 들끓었다. 비록 삼성이 1985년에 완전 우승을 일궈내긴 했지만 한국시리즈 우승에 대한 갈증은 더욱 부풀어져 갔고, 삼성 팬들의 가슴에 응어리졌다.

1986년, 삼성은 3번째로 한국시리즈에 진출, 해태 타이거즈와 맞섰다. 시리즈는 뜻밖의 사태가 발생하는 바람에 삼성의 기운이 꺾여 5차전 단명 국으로 끝났지만, 내용면에서는 팽팽했다. 삼성은 10월 19일 광주 원정 1차전에서 연장 11회 접전 끝에 3-4로 졌다. 그 경기에서 삼성은 3번째 투수 진동한의 호투로 8회 초 공격을 마쳤을 때만해도 2-0으로 앞서 있었다.
8회 말 김영덕 삼성 감독은 진동한 대신 에이스인 김시진을 투입했다. 그 게 시리즈 흐름을 역전시킨 ‘서곡(序曲)’이었다.
‘7회 말 수비를 마치고 덕아웃으로 들어오던 진동한을 향해 한 관중이 빈병을 던졌고, 진동한이 그 병에 맞아 머리를 약간 다쳤다. 잠깐 붕대를 감고 누워있긴 했으나 투구를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당시 일간스포츠 취재기 참조)
김영덕 감독은 그 참에 김시진을 내보냈다. 교체의 적기로 본 것이다. 컨디션이 좋지 않았던 김시진은 9회 말까지 3점을 내주고 동점을 허용했다. 해태는 연장 11회 말 김성한이 김시진을 상대로 역전 결승타를 날렸다. 점수는 4-3. 그 일이 빌미가 돼 사흘 뒤 대구에서  ‘앙갚음 관중 난동’으로 이어질 줄은 그 때만해도 아무도 몰랐다.
20일 2차전(광주)에서는 삼성이 2-1로 이겼다. 시리즈 1승 1패.
마침내 10월 22일 3차전. 김시진(4자책점), 진동한이 이어 던진 삼성이 선제점을 뽑고도 5-6으로 역전패했다. 이미 경기 시작 전부터 경기장 분위기가 술렁거리며 심상치 않았던 터.
경기 도중 간헐적으로 그라운드에 빈병 따위를 던졌던 대구관중들(입장자수 1만2311명)은 삼성이 역전패 하자 급기야 격앙되기 시작,  경기장에 술병과 쓰레기 등을 마구 던져댔다. 양 팀 선수단은 황급히 덕아웃 뒤쪽으로 피신했다. 
관중 가운데 극도로 흥분한 2000여 명은 경기가 끝난 밤 9시 45분께부터 폭도로 돌변, 대구시민구장 밖에 세워뒀던 해태 구단버스를 에워싸고 누군가 돌을 던져 앞 유리창을 깼다. 뒤미처 불을 질렀다. 해태선수단의 리무진 버스(전남5가 9405)가 삽시간에 불길에 휩싸여 전소됐다. 방화 직후 소방차가 출동했으나 바리케이트까지 친 과격 팬들의 저지로 접근조차 하지 못했다. 일부 관중들은 주차장에 세워져 있던 시민들의 승용차 유리창도 부수는 등 흥분이 극도에 이르렀다.
난동 관중들은 밤 11시까지 출동한 경찰과 대치, 농성을 벌였다. 난동 과정에서 관중들은 “진동한 선수 사고에 대해 사과하라, 타도 해태”같은 구호를 외쳤다. 관중들은 경찰이 최루탄을 쏘며 시위 진압에 나선 다음에야 흩어지기 시작했다. 경기장 관리실로 대피, 1시간 이상 갇혀 있었던 해태 선수단은 밤 11시 5분께 경찰이 내준 버스로 숙소인 수성관광호텔로 돌아갈 수 있었다. 대구 북부경찰서는 난동 관중 일부를 현장에서 연행, 조사를 했다. 
양 팀 선수들의 피해는 없었지만 KBS 카메라 기자가 애꿎게 소주병에 허리를 얻어맞아 중상을 당했다.
이 사태로 다음날 한국시리즈 4차전 속행 여부를 놓고 진통이 일었다. 그런 분위기로 경기를 속행한다는 것이 무리라는 의견도 있었던 것이다. 한국야구위원회(KBO)는 긴급 간부회의를 소집, 대구경기 진행 여부를 숙의했고, 대구시, 대구시경찰청 등과 연석회의를 가진 뒤 경기 당일인 23일 오전 11시에 최종적으로 강행을 결정했다.  ‘천재지변이 아닌 이상 일정을 바꿀 수 없다’는 원칙을 앞세운 것이다.
이 ‘방화사건’은 책임소재를 놓고 삼성 구단과 KBO가 실랑이를 벌여 구단주 회의까지 열어 ‘삼성 배상’ 결론을 낸 일화가 있다. 당시 리무진 버스 한 대 값이 8, 9000만 원가량인 것으로 알려졌는데, 삼성 구단 측이 5000여 만 원을 들여 해태버스를 수리해준 것으로 전해진다. 
당시 삼성 구단 홍보 관계자는 “삼성 구단에서는  KBO가 내야한다, 우리는 못 낸다고 주장했지만, 나중에 수리를 해준 걸로 알고 있다. 지금 같으면 KBO가 내는 것이 맞다”고 증언했다. 
KBO의 시각은 물론 다르다. 비록 포스트 시즌을 KBO가 주관하는 것은 맞지만 ‘현지의 관중 난동의 책임 문제까지 KBO가 떠안을 수는 없다’는 것이었다.
그와 관련, 이용일 초대 KBO 사무총장은 “이병철 회장이 TV로 경기를 시청했는데 불난 것까지 봤다고 한다. 그 자리에서 같이 봤던 참모들한테 ‘저 불낸 것은 누가 책임을 져야하느냐’고 묻자 참모들이 ‘코리안 시리즈는 KBO가 주재하는 것이므로 삼성은 책임이 없다’고 했다는 말을 들었다.”면서 “도중에 이건희 회장이 나서서 일을 잘 수습한 걸로 기억한다”고 회상했다.
보상 문제는 해를 넘겨 이듬 해 1월 14일에 삼성 구단측의 요청으로 신라호텔에서 구단주 간담회를 열어 만장일치로 삼성이 수리비 일체를 지불하는 것으로 유권해석을 내렸다.  서종철 총재를 비롯해 구단주 또는 구단주 대행들이 참석했던 그 자리에서 두 가지를 의결했다.
KBO 회의록에 따르면,
‘(1)프로야구 전 경기(전, 후기리그, 플레이오프, 한국시리즈)는 홈 및 어웨이 체제 확립. 모든 경기는 홈구단이 관객 유치 및 질서유지와 안전보장에 따른 예방조치를 위하여 최대한 노력해야 하며, 사고가 발생했을 경우 홈구단은 변상을 비롯해  모든 책임을 져야 한다.
(2)삼성 라이온즈는 1986년 10월 22일 대구에서 발생한 해태 화재사고 버스의 책임을 지기로 합의’ 했다.
텃세 응원이 기승을 부렸던 1980~1990년대, 어느 지역을 가릴 것 없이 일부 관중들은 꼬투리만 잡히면 자신의 응원 팀은 물론 상대 팀 버스나 심지어 선수들에게도 위해를 가하는 행동을 서슴지 않았다. 지나간 시대의 서글픈 우리 얼굴이다.
‘타는 목마름으로’ 한국시리즈 우승을 염원했던 삼성 구단은 2000년에 해태 구단의 상징이었던 명장 김응룡 감독을 전격 영입, 2002년에 드디어 우승 숙원을 풀었다. 2005, 2006년에는 호남 선수의 대명사인 선동렬을 감독으로 승격시켜 한국시리즈를 연패, 명실상부한 최강자의 위용을 갖추게 됐다. 삼성이 명가 해태 구단의 핵심 두 인물을 끌어들여 영, 호남 야구를 접목시켜 도약의 발판을 마련했다는 점은, 한국야구사의 ‘역설’이다. 
/홍윤표 OSEN 선임기자
대구 관중들의 난동으로 전소된 해태구단 버스의 모습.(제공=스포츠 서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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