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세계' 황정민, 더 이상의 조폭연기는 없다
OSEN 손남원 기자
발행 2013.02.13 14: 21

황정민, 어떤 역도 잘 소화해내는, 조폭이 가장 잘 어울리는
[유진모의 테마토크] '장군의 아들'과 '쉬리'에 단역으로 출연하며 영화의 맛을 잠깐 봤던 황정민(43)이 본격적인 영화배우가 된 것은 2001년 '와이키키 브라더스'를 통해서다. 그리고 그는 2002년 흥행에서는 참패했지만 영화 마니아들 사이에서 호평을 받은 '로드 무비'에서 주연을 맡으며 연기파 스타의 탄생을 예고한다.
덥수룩한 머리에 제멋대로 자란 수염, 약간 늘어진 눈꼬리는 사람 좋아 보이지만 어딘지 모를 깊은 그늘이 느껴지는 표정이다. 남모를 사연을 간직한 채 남자를 사랑하는 고독한 영혼을 가진 대식을 신인배우 황정민은 참으로 기가 막히게 연기했다.

그렇게 황정민은 흑백으로 처리된 스크린만큼이나 러프한 이미지로 확실하게 자신의 존재감을 영화 관계자들에게 각인시킨 뒤 차근차근 성장해나갔다.
황정민 하면 관객들은 '댄싱 퀸'(2012)의 순수하면서도 열정적인 서울시장 황정민, '부당거래'(2010)의 출세와 생존을 위해 물불 안 가리는 광역수사대 형사 최철기, '너는 내 운명'(2005)의 순수한 사랑에 영혼까지 내건 순박한 시골 노총각 석중 등의 이미지를 떠올리지만 알 만한 사람들은 '로드 무비'의 대식과 조연으로 출연해 잠깐이지만 강력한 임팩트를 준 '달콤한 인생'의 백 사장을 잊지 못한다.
그는 어느 장르에서 어떤 역할을 맡기더라도 훌륭하게 소화해내는 연기파 배우인데 특히 고독한 영혼(대식)이나 조폭(백 사장)이 잘 어울린다.
'달콤한 인생'에서 엘리트 조폭 선우(이병헌)를 무시하고 경계하던 백 사장은 그러나 막상 선우의 손에 죽을 위기에 처하자 더 없이 비굴해진다. 그만이 해낼 수 있는 캐릭터였고 그가 해냈기에 더욱 빛났던 인물이었다. '아니 뭐, 세상살이가 다 그런 것 아냐'라고 선우에게 애원하며 살고자 하는 그를 관객들은 이병헌 만큼 잊지 못하고 '저 배우 누구야'라고 극장 문을 나서면서 되새기곤 했다.
그런 그가 이번에는 제대로 조폭이 됐다. 오는 21일 개봉되는 영화 '신세계'에서 그는 국내 최대의 기업형 조직폭력단체인 그룹 골드문의 2인자인 정청 역을 맡아 21세기 조폭의 모델을 제시한다.
'신세계'는 이정재 최민식 황정민 등 단 한 명만으로도 한 편의 영화를 이끌어나갈 수 있는 정상급 주연배우가 한꺼번에 모였다는 점에서 기대치가 높은 작품이다. 게다가 최민식과 황정민은 연기력이라면 둘째 가라면 서러울 그 분야의 최고봉이고 이정재는 1995년 드라마 '모래시계'로 스타덤에 올랐지만 정작 그 이후 드라마에 뜸하고 영화에 매진한다는 희소성에서 반갑다.
영화의 크레딧은 이정재 최민식 황정민의 순서지만 그 어느 누가 주연이라고 얘기할 수 없을 만큼 세 명의 비중이 팽팽한 긴장감을 유지한다. 이들이 뿜어내는 남성성과 강한 개성이 완성해주는 영화 자체가 주연이다.
경찰청 수사기획과 강 과장(최민식)은 8년전 신입경찰 이자성(이정재)에게 극비의 임무를 부여한다. 한창 성장해나가는 조폭 골드문에 신입 조직원으로 잠입하라는 것.
자성은 같은 여수 출신으로 조직에서 촉망받는 중간 보스 정청과 앞장서 조직내의 일을 처리해가며 함께 성장해 나가는 가운데 정청의 절대적인 신임을 얻고 어느덧 정청은 조직내 2인자로 우뚝 선다.
하지만 자성은 갈등한다. 이 임무를 끝내주겠다던 강 과장은 끝내주기는 커녕 더욱더 많은 임무를 부여하고 자신마저도 믿지 못하는 듯 또 다른 경찰을 조직에 잠입시켜놨으나 그에게 누구인지 감춘다. 하지만 정작 자성은 자신이 속이고 있는 정청에게는 끈적한 사나이의 우정과 더불어 한 없는 신뢰감을 느낀다. 그래서 그는 고민하고 번뇌하는 가운데 어느덧 자신도 모르게 깡패가 돼간다.
강 과장과 이자성의 중간에 서있는 정청을 연기하는 황정민은 흡사 연기의 교과서, 깡패 캐릭터의 모델을 제시하는 듯하다.
더위에 흐르는 땀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감독이 날 것 그대로 잡았다고 하는 배우들의 무보정 얼굴 피부의 클로즈업 샷은 특히 조폭두목 황정민의 화면에서 더욱 빛을 발한다. 얼굴 피부의 요철이 그대로 드러난 콘트라스트는 정청이라는 인물의 캐릭터를 완벽하게 살려준다. 그것은 정청을 황정민이 연기했기 때문이다.
정청은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순수한 인간미와 잔인한 출세욕을 동시에 지닌 인물이다. 8년전부터 함께 칼과 각목을 휘두르며 현장에서 생사고락을 같이 한 자성이 그에게는 유일한 믿음이고 의리다. 그래서 중국 출장을 갔다 올 땐 꼭 자성에게 줄 선물을 잊지 않는다.
그런데 그게 진품이 아닌 가품이다. 그렇다면 자성을 우습게 본다는 의미? 아니다. 자신이 착용한 명품 선글래스도 가품이다. 그만큼 순박하단 의미다.
입국하는 차림새가 정갈한 콤비 정장으로 한껏 멋을 냈지만 정작 신사의 패션의 완성인 반짝거리는 구두는 온데 간데 없고 맨발에 슬리퍼다. 이건 아무리 치장을 하고 숨기려 해봐야 깡패는 무식한 깡패일 수 밖에 없다는 의미다. 그리고 사람 북적이는 공항 대합실에서 그 발로 조직의 부하에게 발길질을 한다. 참으로 깡패 역할이 잘 어울린다.
그리고는 무지함을 조금이라도 감추기 위함인지 자성에게 '아우야'나 '아야'라는 전라도 사투리 대신 '어이 브라더'라고 꼴에 영어를 쓴다. 역시 잘 어울린다.
하지만 그의 반대편의 캐릭터는 못됐고 잔인하다. 마음에 안 든다고 조직원에게 그의 선배 조직원을 때리라고 명령한다. 깔끔하지 못하고 악의적이라는 의미다. 게다가 그는 자신을 이용하려는 강 과장의 뜻을 따라주는 척하더니 오히려 거금으로 그를 매수하려한다. 강 과장이 이를 거부하자 그는 조직 내에 침투한 또 다른 경찰을 색출해내 말 한 마디 없이 심하게 폭행해 죽인다. 피도 눈물도 없다는 표현이 그렇게 들어맞을 수 없다.
정청은 굉장히 가볍고 코믹한 캐릭터지만 그 이면에는 그 누구보다 차가운 냉정함과 냉철함이 도사리고 있는 인물이다. 여러 조직이 모인 연합조직 골드문에서 살아남는 것을 넘어서 새로운 1인자가 되기 위해 그는 누구보다도 명석한 두뇌를 활용하고 빠르게 판단해 행동에 옮기는 캐릭터다.
무식한 양아치 같지만 실제 일에 대해서만큼은 그 누구보다 명확하고 판단력이 밝은 그다.
조직의 회장이 사고사로 1인자 자리가 공석이 된 상황에서 강 과장의 본격적인 '작전'이 펼쳐지고 첫번째로 정청의 가장 강력한 라이벌이자 후계자 2순위였던 이중구(박성웅)가 구속된다. 당연히 이중구는 자신의 비리를 누설한 배신자로 정청을 지목하지만 정청은 떳떳하게 이중구를 면회한다.
분노하는 이중구 앞에서 덤덤하게 자신이 그런 양아치는 아니라며 자신에게 반발하면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치르게 해주겠다는 정청의 표정은 어찌 보면 순박해보이지만 그 내면에는 심오하고 장엄하며 비장한 각오가 느껴진다.
또한 조직의 수뇌들이 모두 모인 긴급이사회 자리에서 이중구에게 '오랜만에 선배님들 모시고 식사나 하자'고 제안했다가 그에게 '우리가 같이 밥먹을 만큼 가까운 사이는 아니잖냐'고 망신을 당하고서 짓는 표정에서도 복잡미묘하지만 결코 범접할 수 없는 카리스마가 느껴진다. 이 모두 황정민만이 할 수 있는 연기다.
조직폭력 혹은 깡패는 많은 사람들을 위협하고 서민들의 고혈을 짜는 이 사회의 환부이고 악인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신세계'에서 강 과장이 그랬듯 조직폭력은 뿌리 뽑을 수 없는, 잘라내면 그 자리에 또 고름이 생기는 불치병이다. 불행하지만 그것은 이 사회의 부조리와 일부 고위층의 욕심채우기의 언저리에 기생하는 기생충인 것이 엄연한 현실이다. 아무리 구충제를 먹어도 영원히 박멸되지 않는.
한편으론 일부 사회 지도층의 합법을 가장한 비리와 폭력이 조폭보다 더 강력하고 무서워서 조폭이 희화화되고 그 폐해가 희석되는 경우도 있고 심지어는 일부 청소년 사이에서는 미화되기까지 한다.
그래서인지 조폭영화는 재미있다. 이 사회가 100% 투명해지지 않는 한 사라지지 않을 그림자 중의 하나가 조폭이고 그래서 조폭영화는 동서고금을 통해 계속 관객들을 끌어모았다.
관객들에게 인상 깊은 영화 속 조폭은 역시 '내가 니 시다바리가?' '고마 해라, 마이 뭇다 아이가'의 장동건일 것이고 그 영화 '친구'에서 장동건과 팽팽한 연기대결을 펼친 유오성일 것이다. 그리고 '비열한 거리'에서 주인공 조인성의 오른팔이지만 결국 그를 배신하는 역할을 했고 최근 '26년'에서 역시 조폭 캐릭터를 훌륭하게 소화해낸 진구가 있다.
하지만 뭐니뭐니 해도 조폭 역이 가장 잘 어울리고 다양한 스펙트럼을 한꺼번에 소화해낼 수 있는 배우는 역시 황정민이 으뜸이다. '신세계'가 기대되는 이유는 관록의 최민식과 섹시한 조폭 캐릭터의 이정재도 있지만 역시 그 아니면 그 어느 누구도 해낼 수 없는 유니크한 인물을 만들어가는 황정민이 있기 때문이 아닐까?
[언론인, 칼럼니스트] ybacchus@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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