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희선의 작전타임] '농담'으로 덮기엔 너무 커진 '박은선 논란'
OSEN 김희선 기자
발행 2013.11.07 07: 38

성인 무대 데뷔 후 벌써 9년이 지났다. 여자축구선수로서 아시아여자선수권대회, 여자월드컵, 올림픽, 동아시아대회 등 굵직굵직한 국제대회에 출전해 태극마크를 달고 뛰었다. 걸출한 실력 때문에 '여자 박주영'이라는 별명도 붙었다. 대표팀으로 나선 그가 골을 넣으면 모두가 환호했다. 하지만 뜬금없이, "너는 여자가 아닐 수도 있으니 경기에 나서지 말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여자축구선수로 살아온 27년의 인생을 부정당한 박은선(27, 서울시청)은 어떻게 해야할까.
박은선의 소속팀인 서울시청을 제외한 WK리그 소속 6개 구단 감독들이 최근 비공식 간담회를 열고 "내년 박은선을 WK리그 경기에 뛰지 못하도록 하자"고 결의한 것으로 알려져 파문이 일고 있다. 구단 감독들은 한국여자프로연맹에 "박은선이 계속해서 WK리그 경기에 나설 경우 2014년도 시즌에 출전을 하지 않겠다"며 보이콧 의사를 전달한 것으로 밝혀졌다. 6일 예정된 WK리그 단장회의에서 정식결의서를 제출할 움직임이 감지되고 있다는 것.
이들은 박은선의 성별논란을 제기하면서 내년에 박은선이 리그에 뛸 수 없도록 조치를 요구한 것으로 알려졌다. 만약 박은선이 계속 경기에 뛰면 내년 리그 보이콧도 불사하겠다는 강경한 의지다. 하지만 파문이 커지면서 비난의 목소리가 덩달아 커지자 '농담이었다'로 변했다. 서정호 감독이 한 매체와 인터뷰서 비분강개하며 "(타 감독들이) 농담으로 얘기했다고 하는데 농담으로 얘기했으면 농담으로 끝내야지, 사람 죽여놓고도 농담이라 할 거냐"며 분노한 이유다.

▲ 박은선 죽이기, 복귀 첫 해에는 잠잠하더니 다시 고개든 소문
박은선의 별명은 '여자 박주영'이다. 당시 국가대표팀 부동의 원톱 스트라이커로 이름을 날리던 박주영만큼 실력이 뛰어나다고 해서 붙여진 별명이다. 그런데 박은선에게는 별명이 하나 더 있다. '풍운아'다. 실력과는 달리 멘탈이 약해 방황을 거듭했기 때문에 붙여진 별명이다. 초중고 무대에서 두각을 나타낸 박은선은 2005년 서울 시청 입단 후에도 팀 이탈과 복귀를 수 차례 반복했고, 지난 2010년 봄 이후로는 아예 팀 복귀를 하지 않아 서정호 서울시청 감독의 속을 썩였다.
그런 박은선이 지난 해 마음을 다잡고 리그에 돌아왔다. 2011년 11월 동계훈련부터 팀에 합류해 달라진 모습을 보였고 올 시즌 컨디션을 100% 끌어올리며 19골로 득점왕까지 차지했다. 그러자 그가 WK리그에 복귀할 당시 조용하던 '소문'이 고개를 들었다. 그의 복귀에 대해 반대의사를 표하지 않았던 감독들도 사적인 자리에서 공공연히 소문을 이야기하고 다녔다.
오랜 방황으로 인해 부진한 모습을 보인 2012년에는 이런 움직임이 없었다. "왜 대표팀에 뽑히지 않느냐"는 의혹 섞인 수근거림은 있었다. 하지만 이번처럼 황당무계한 문제제기는 없었다. 박은선이 서울시청 관계자의 말마따나 "혜성처럼 등장한 선수"였다면 또 모른다. 한국여자축구의 대들보로서 2003년 아시아 여자선수권과 미국 여자 월드컵, 2004년 아테네 올림픽, 2005년 동아시아대회 등에서 대표팀 소속으로 뛰었고 대한축구협회에도 여자로 등록돼 있다.
박은선의 성별이 여성이다 혹은 남성이다의 문제를 떠나 인권에 대한 문제로 치닫게 된 발단이 바로 여기에 있다. 좁디 좁은 여자축구계에서 27년의 축구인생을 보낸 선수에게 이제와서 '너는 여자가 아닐 수도 있다'고 손가락질하는 것, 그것도 타국의 감독이나 선수가 아닌 자국 리그의 '스승뻘' 감독들이 의혹을 제기하는 것 자체가 곧 박은선 죽이기일 수 있다.
▲ "성별검사 한 두번 받은 것도 아니고" 허탈한 박은선
논란이 확산되자 박은선은 6일 새벽 자신의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인 페이스북 계정을 통해 심경을 토로하는 글을 남겼다. 박은선은 "한 가정의 딸로 태어나 28세가 됐다. 나를 모르는 분들도 아니고 웃으면서 인사해주시고 걱정해주셨던 분이 이렇게 나를 죽이려든다"며 씁쓸한 마음을 전했다.
박은선은 이어 "성별검사 한 두번 받은 것도 아니고 월드컵, 올림픽 때도 경기출전 다했다"며 "그때도 어린 나이에 기분이 좋지 않았고 수치심을 느꼈는데 지금은 말할 수도 없다 내가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며 이번에 불거진 성정체성 논란에 반박했다.
그의 말처럼, 박은선의 성별논란이 제기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2010년 중국 대표팀의 상루이화 감독이 아시아축구연맹 여자아시안컵을 앞두고 박은선의 성별 검사를 요구한 바 있다. 당시 박은선은 최종 엔트리에서 탈락해 이 일은 해프닝으로 끝났지만, 박은선에게는 충분히 상처로 남을만한 일이었다. 또한 성별 논란에 휩싸였던 간성(間性) 육상선수 캐스터 세메냐의 예를 들어 박은선을 의심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이처럼 박은선은 근 10여년 넘게 국제무대에서 뛰며 여자축구선수로 인정받았지만 타고난 신체조건 때문에 간간히 불거지는 성별논란에 고스란히 노출됐다. 문제는 박은선의 축구인생을 알고 그가 상처받아온 과정을 잘 아는 사람들이 다시 한 번 그 상처를 헤집었다는 것이다.
박은선에 대한 이야기는 사담(私談)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리그를 치러나가는 6개 구단 감독들이 모여 간담회에서 선수의 성별 논란을 제기한 것도 우스운 일인데 이를 공언화시키며 보이콧을 무기로 삼아 선수의 출전을 금지시켜달라고 요구하고 있다. 방법도 과정도 모두 억지다.
일각에서는 이번 6개 구단 감독들이 제기한 성별논란을 두고 박은선의 멘탈을 흔들기 위한 '꼼수'로 보는 시각도 있다. 팀 이탈과 잦은 방황으로 '풍운아' 소리를 듣던 그 때의 박은선으로 되돌리려는 것이 아니냐는 불쾌하고 안타까운 의심이다. 서 감독이 7일 서울시체육회가 주최하는 이번 사태 관련 기자회견에 직접 나서려는 이유다.
박은선은 자신을 향한 수근거림에 당당하게 내질렀다. "니들 하고 싶은대로 해라, 나도 내 할 일을 하련다. 단디(똑똑히) 지켜봐라. 여기서 안 무너진다. 니들 수작 다 보인다"고 한다. 좀처럼 식을 기미가 없는 '박은선 논란'. 팬들도, 대중도 이번 일의 결말을 '단디' 지켜봐야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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