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희선의 작전타임] ‘빅토르 안’ 안현수가 침묵하는 이유
OSEN 김희선 기자
발행 2014.02.04 06: 59

이제는 그를 안현수라 부를 수 없다. 그는 여전히 안현수지만, 우리는 올림픽에서 ‘빅토르 안’으로 불리는 러시아의 선수를 만나게 될 뿐이다.
안현수(29, 러시아명 빅토르 안)의 이름 뒤에는 항상 ‘비운의 천재’, ‘쇼트트랙 파벌 문제의 희생양’이라는 수식어가 뒤따른다. 2006 토리노동계올림픽에서 3관왕을 달성하며 ‘쇼트트랙 황제’로 불리던 그에게 ‘비운’, ‘희생양’이라는 수식어가 주는 느낌은 낯선 만큼 안타깝다.
한국 쇼트트랙의 대들보였던 그가 러시아 귀화라는 선택지를 앞두고 얼마나 고민했을지는 당사자가 아니라도 짐작할 수 있다. 고국을 버리고 국적을 바꾼다는 사실은 결코 쉬운 결정일 수 없다. 더구나 어린 시절부터 태극마크를 달고 시상대 위에서 애국가를 불러오던 청년이 현실의 벽 앞에 좌절한 후 다른 나라의 국기를 가슴에 다는 것을 선택했다는 사실은 실로 가슴아픈 일이다.

안현수가 왜 러시아 귀화를 선택했는지, 그럴 수밖에 없던 사정이 무엇인지는 이미 많은 이들이 알고 있다. 2014 소치동계올림픽을 앞두고 다시 수면 위로 떠오른 안현수, 아니 ‘빅토르 안’의 존재가 주목받으며 그가 러시아 귀화를 선택한 이유도 재조명됐기 때문이다. 짧은 분노와 집중적인 관심, 그리고 그의 선택을 지지하는 이들과 반대하는 이들, 많은 이야기들이 안현수를 둘러싸고 오고 갔다. 아마도 소치동계올림픽이 폐막하는 그 순간까지 안현수는 자신의 고국인 한국에서 끊임없이 회자될 것이다.
안현수의 존재는 한국 쇼트트랙계에 있어 역린(逆鱗) 그 자체다. 부상을 딛고 돌아온 안현수의 존재에 한국 쇼트트랙은 부메랑을 맞을 위기에 처했다. 같이 훈련하고 얼음을 지치던 선수들은 다른 나라의 선수로 그와 경쟁해야하는 상황이 버거울 것이다. 대중의 시선은 이미 안현수와 한국 쇼트트랙을 선악 구도로 이분화하고 안현수를 ‘상처입은 영웅’으로 만들었다. 반대급부는 고스란히 한국 쇼트트랙 선수들에게 돌아갈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아직 어린 선수들은 인터뷰나 기자회견에서 안현수의 이름이 나오면 곤혹스러운 내색을 감추지 못했다. 윤재명 남자대표팀 감독은 목동에서 열린 지난 2013-2014시즌 월드컵 2차대회를 앞두고 “안현수도 이제 그저 한 명의 외국인 선수에 불과하다”며 선수들의 부담을 줄여주고자 했지만, 안현수가 드리운 거대한 그림자 속에서 스케이트를 타야할 선수들의 마음은 여전히 무거울 것이다.
이런 상황을 자초한 이는 누구일까. 결국은 한국 빙상계의 병폐가 낳은 문제다. 동계올림픽에서 사실상 유일하게 한국에 메달을 안겨준 종목이 바로 쇼트트랙이다. 2010 밴쿠버동계올림픽에서 김연아(24)가 피겨스케이팅 첫 메달을 따내고, 이상화(25, 서울시청)와 모태범(25) 이승훈(26, 대한항공)이 나란히 메달을 수확하며 한국의 메달밭을 넓혔지만 그전까지 쇼트트랙은 절대적이고 유일한 메달밭이었다. 한국이 1948 생모리츠동계올림픽 첫 출전 이후 거둬들인 45개의 메달 중 쇼트트랙에서만 금메달 19개를 포함해 37개의 메달이 나왔을 정도다.
금메달에 걸린 병역혜택은 더할 나위 없이 매력적인 포상이었다. 걸려있는 보상이 크면 그만큼 욕심도 커지기 마련이다. 동계올림픽에서 유일하게 메달 가능성이 있는 쇼트트랙을 둘러싸고 짬짜미 논란과 파벌 문제가 벌어진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수순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봉합하는 과정이 너무 서툴렀고, 책임 전가와 어설픈 뒷수습은 많은 이들에게 상처를 남겼다. 쇼트트랙을 타는 것만이 인생의 목표였고, 또 인생 그 자체였던 안현수가 러시아로 떠날 수밖에 없었던 이유다. 그리고, 한국 쇼트트랙이 ‘빅토르 안’이라는 부메랑을 각오해야만 하는 이유기도 하다.
안현수는 지난 1일 오후 전지훈련을 마치고 소치에 입성했다. 그의 팀 동료인 러시아 대표팀과 함께 공항에 나타난 안현수는 한국 취재진의 인터뷰 요청에 난처한 미소와 함께 그저 “죄송합니다”라는 답변만을 전한 것으로 알려졌다. 귀화 후 처음으로 한국에 휴가차 입국했을 당시 옅은 미소와 함께 러시아 생활을 전했던 것과는 많이 다른 반응이었다.
그만큼 안현수의 마음가짐이 바뀌었음을, 또 그의 위치가 이전과는 달리 많이 바뀌었음을 짐작할 수 있는 이야기다. 고국의 인터뷰를 거절하고 침묵을 지킨 안현수는 이제 ‘빅토르 안’으로서 얼음 위에서 최선을 다할 것만을 생각하고 있는 듯하다. 귀화 신청 당시만 해도 국적을 포기할 생각은 없었으며 이중국적이 허용되는 줄 알았던 안현수는 이제 없다. 국적 회복 가능성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선결 과제가 있다. 그의 아버지 안기원씨가 주장하듯, “대한빙상경기연맹의 인적 쇄신”이 우선이다.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설령 추후 안현수가 국적을 회복해 ‘빅토르 안’에서 ‘안현수’로 돌아온다해도, 당면한 소치동계올림픽에서 그가 러시아 선수로 나선다는 사실에 변함은 없다. 개막을 앞둔 소치동계올림픽에서 안현수는 ‘빅토르 안’으로서 최선을 다할 것이다. 러시아에서 쇼트트랙은 비인기 종목이지만, 빅토르 안이 자국에서 열리는 올림픽에서 사상 첫 쇼트트랙 금메달을 안겨준다면 그 이름의 원 주인인 빅토르 최를 능가하는 슈퍼스타로 이름을 알리게 될 것은 자명하다. 러시아 국가를 연습하고 있다는 빅토르 안의 이야기는 가슴 아프면서도 안타까운 지금의 현실이다.
세 번의 올림픽을 치르며 두 나라의 국기를 달고 경기장에 나설 안현수. 수많은 고민으로 하얗게 지샌 안현수의 밤은 이제 끝났다. 한국 취재진을 향해 침묵한 안현수의 결심은 확고하고, 이제 우리는 러시아의 빅토르 안이 달리는 모습을 보며 안현수를 추억해야할 상황에 놓였다. 어쩌면 이번 소치동계올림픽이 끝난 후 금메달을 들어보이며 환하게 웃는 ‘빅토르 안’을 다시 되찾아와야한다는 물결이 일지도 모르겠다. 물론 그 답은 결자해지(結者解之) 뿐이지만 말이다.
김희선 기자 costball@osen.co.kr
소치(러시아)=박준형 기자 soul1014@ose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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