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구장 밖의 야구인들](1)개인택시 핸들 잡은 MBC 청룡 원년 멤버 배수희 씨…‘땅꼬마’ 유희관에 대한 추억을 말하다
OSEN 홍윤표 기자
발행 2014.02.07 07: 30

“안녕하십니까.”
“안녕히 가십시오. 감사합니다.”
아무 것도 이상할 턱이 없는, 지극히 평범한 인사말이다. 그런데 개인택시 기사인 그로서는 단순한 인사말이 아니다. 그가 택시를 타는 손님에게 “어서 오십시요.”가 아닌, “안녕하십니까.”로 인사를 건네는 까닭이 있다. 바로 “어서 오십시오.”라는 말 속에 손님을 돈벌이의 대상자로만 바라보는 ‘불순한 의도’가 숨어 있기 때문에 굳이 “안녕하십니까.”로 부른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그는, 1982년 한국 프로야구 원년 MBC 청룡의 외야수였던 배수희(59) 씨다. 배 씨는 현재 개인택시 운전기사이다.
배수희 씨는 MBC에서 단 한 해동안만 외야수로 선수생활을 했다. 경동고 출신으로 유승안 경찰야구단 감독과 고교 동기생이다. 고교 시절 이름난 투수였지만 짧은 프로 생활을 마치고난 후 1983년부터 구단 프런트에서 원정기록원, 스카우트, 통역, 구장관리 요원, 고교야구팀 인스트럭터 등 다양한 경험을 쌓았다. 1984년에 MBC의 원정기록원으로 ‘음지’에서 일했던 그는 일본어를 독학, 1986년부터 1987년까지 MBC의 일본인 미즈타니 코치의 통역으로도 활동했고 1992년에는 운영 팀에서 구장 관리 요원으로도 일했다. 1996년에 6개월간 일본 주니치 드래곤즈 구단에서 지도자 연수 이력도 지닌 그는 3년간 LG 트윈스 투수코치도 경험했다.
그 후 1999년부터 2001년까지는 LG 스카우트로, 2003년부터 2010년까지 한화 이글스 스카우트로 야구 현장에서 살았다. 
배수희 씨가 택시 핸들을 잡게 된 동기는 어찌 보면 단순하다. 야구 판에 오래 있었고, 두 아들 공부도 다 시킨 마당에 굳이 남 밑에서 일하기 싫어서였다. “돈을 떠나 나이 든 뒤에 할 만한 직업이 마땅치 않아 남들 보기에는 어떨지 모르겠지만 정년도 없고, 건강만 허락한다면 오래 일할 수 있는 것을 찾다 보니 택시 운전을 하게 됐다.”는 게 그의 솔직한 설명이다.
환갑을 바라보는 나이에 “현실에 맞게 살아야한다는 판단에서”그가 선택한 일이었다.
그는 무리하게 일을 하지 않는다. 새벽 4시에 핸들을 잡고 저녁 8시께면 집(서울 이태원동)으로 들어간다. 이른 시간에 귀가하는 것은 밤늦은 시각 취객들의 성화를 받기 싫어서이다. 이틀 일하고 하루 쉬는 흐름인데, 쉬는 날은 반드시 부인과 함께, 때로는 산악회에 편승해 서울 근교 산을 찾거나 하다못해 나 홀로 집 근처 남산에라도 올라야 직성이 풀린다. 물론 건강한 삶을 위해서다.
일반 회사 택시를 3년간 한 다음 개인택시 면허를 사서 일하고 있다. 택시 운전을 하고난 다음부터 그는 “조직의 스트레스가 없어 자유를 느낀다.”며 편안한 얼굴이다.
보람이 있는 일이라고 그는 생각한다. 일하고 돈도 조금 벌고, 특히 “노인들이나 어린아이들, 바쁜 사람들을 목적지까지 안전하게 모셔드리는 것 자체가 즐거움”이라고 말한다. 개인사업자로 내 일, 내 사업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면, 그저 “배짱이 편할” 뿐이다.
야구에의 미련? 왜 없겠는가. 하지만 “누가 불러줘야 일을 하지”가 그의 천연덕스런 대답이다. 일 때문에 실제로 야구를 볼 시간도 별로 없다.
이태원 자택에서 만난 그는 두산 베어스 투수로 지난해 깜짝 등장, ‘몰라보게 달라진’ 유희관(28)과 얽힌 일화를 들려줬다. 그가 배재고 투수 인스트럭터를 맡아봤던 2002년 유희관은 배재고 1학년생이었다. 155cm로 키가 너무 작고 볼품없었던 유희관이 하는 일이라곤 그의 표현에 따른다면, “유니폼은 입었지만 운동도 안 시키고 감독의 심부름을 하거나 개를 돌보는 게 고작”이었다. 
그래서 그가 감독이 자리를 비우면 유희관에서 펑고를 쳐주거나 배팅볼 연습을 시켰다. 유희관은 당시 복근운동 10회도 제대로 소화하지 못한 정도로 체력도 형편없었다. 4개월간 인스트럭터를 봤던 배수희 씨는 유희관에서 그런 훈련을 계속 시켰다. 그러다가 배재고 선수 17명이 감독의 훈련방식에 반발, 집단으로 학교를 떠나는 사태가 발생했다.
유희관은 유영준 감독(52. 현 NC 다이노스 스카우트)이 있는 장충고로 옮겼다. 배수희 씨는 장충고에 자주 들러 가까이 지낸 유영준 감독에게 조언했다. “유희관에게 1년 내내 배팅 볼만 던지게 하라”고. 키가 작아 도무지 써먹을 수 없었던 유희관이 선수로서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은 컨트롤이 좋은 투수가 되는 것이었다.
2학년에 올라갈 즈음 배수희 씨는 유희관에게 느린 커브를 가르쳐줬다. 공 빠르기가 130 km도 안 나오는 처지여서 90km대로 스피드를 뚝 떨어트리는 완급 조절 능력을 기르는 것이 중요하다는 판단에서였다. 프로로 갈 실력인 안됐던 유희관은 3학년 초 지방대에 진학하기로 일찌감치 결정이 나 있었다. 하지만 배수희 씨는 인천에서 만난 중앙대 정기조 감독에게 유희관을 “컨트롤이 좋은 장래성 있는 투수”라고 추천, 결국 유희관은 중앙대로 진로를 바꾸었다. 유희관은 배수희 씨의 ‘양 아들’이었다.
배수희 씨는 구단 프런트에서 일 할 때 여러 가지 업적을 남겼다. 1994년 LG가 우승하던 해 봄철 캠프지로 우리나라 프로야구단 가운데 처음으로 오키나와를 개척한 것이 바로 그의 작품이었고, 원정기록원으로 캠코더를 사용한 것도 그가 선구자격이다. 백인천 감독이 지휘봉을 잡고 LG를 창단 첫해 우승을 시켰던 1990년에 그는 그해 12월 일본 주니치 구단에 출장을 갔을 때 “원래 통관이 안 되는 품목인줄도 모르고 있는 돈 없는 돈 다 털어 당시 100만 원이 넘는 캠코더를 사가지고 들어오다 김포공항 세관에 압류당해 애를 먹었던” 사연도 털어놓으며 쓴 웃음을 지었다.
배수희 씨의 집에는 야구관련 서적이 많다. 특히 일본에 가면 틈 날 때마다 사 모은 일본 야구 책만 400권이 넘는다. 그는 에 20회 가량 연재했던 야구이론을 모아 지난 2000년에 LG 구단의 이름으로 ‘배수희 편저’를 달고 라는 책도 펴냈던 학구파였다. 그는 그 책에 대해 “여러 이론을 그러모은 것”이라며 겸손해 했다. 그렇지만 는 변변한 야구 이론 서적이 없었던 당시 고교 등의 지도자들에게 큰 인기를 끌었던 책이었다.
 
배수희 씨는 구차한 삶을 거부하고 자유로운 생활의 길을 택했다. 남한테 신세 안지고, 비록 넉넉하지는 않지만 자신의 정직한 노동으로 살아가려고 노력한다.
그의 사전에 ‘승차거부’란 말은 없다. 손을 드는 손님은 무조건 태운다. 그는 “일하는 것이 즐겁고, 손님 만나는 것이 즐겁다. 즐겁게 일한다.”면서 “이 일을 하면서 아직 한 번도 후회한 적이 없다. 나이 들수록 잘 했다는 생각이다.”고 말했다.
마음의 여유를 갖고 끼어드는 차량이 있으면, 마음 편하게 양보를 해준다. ‘양보와 여유’가 그의 운전철학이다. 어쩌다 새벽에 운전을 나가면 반드시 만나는 게 젊은 취객이다. 이유 없이 욕지거리를 당할 때도 있다. 신호를 무시하고 그냥가라는 요구를 하거나 ‘왜 이리로 돌아가느냐’며 얼토당토않은 시비를 거는 손님도 있다.
택시 운전을 하면서 온갖 사람을 만나고 밑바닥 인생살이를 알 게 된 배수희 씨는 오늘도 “내가 할 수 있는 일, 즐거워야 한다.”면서 핸들을 부드럽게 돌리고 있다. 
/글. 사진 홍윤표 OSEN 선임기자
배수희 씨가 자신의 개인택시 앞에 서 있는 모습.
1982년 1월 26일 서울 문화체육관에서 열렸던 MBC 청룡 창단식 광경과 그 시절의 배수희 씨
희귀본이 된 1983년 한국프로야구연감 창간호를 보고 있는 배수희 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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