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근영의 저공비행, 혹시 우리에게 책임은 없을까
OSEN 최나영 기자
발행 2014.06.11 16: 12

[OSEN=김범석의 사이드미러] 지난 달 칸 영화제 출장 때 가져간 10여권의 시나리오 중 유일하게 캐리어에 도로 담아온 책이 하나 있다. 송강호 유아인 주연 ‘사도’(이준익 감독)다. 무료한 기내에서 캐스팅 된 배우들을 하나씩 떠올리며 다시 페이지를 넘기니 중반부턴 아껴가며 읽고 싶을 만큼 감칠맛이 더했다. 특히 영조 역 송강호는 배우에 맞게 대사가 손질된 덕분에 매 장면이 라이브로 느껴질 만큼 생생했다.
그런데 책을 덮고 문득 이런 물음표가 하나 찍혔다. 문근영은 왜 이 영화 출연을 결심한 걸까. 고민은 없었을까. 작은 배우는 있어도 작은 배역은 없다지만, 문근영이 하기엔 혜경궁 홍씨 역할이 분량과 비중 면에서 상대적으로 아쉽다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 없었다. 더군다나 이 영화는 ‘사랑따윈 필요없어’ 이후 무려 8년 만의 스크린 컴백작이 아닌가.
‘가을동화’부터 ‘불의 여신 정이’까지 15년간 연기에 관한한 단 한 번도 잡음을 듣지 않았던 '천재 배우' 문근영의 데뷔 후 첫 모성 연기, 미치광이로 몰려 뒤주에 갇혀 죽은 비운의 왕 사도의 아내, 유아인과의 부부 호흡 등 마케팅 면에서 화제가 될 만 한 포인트는 여럿 있겠지만 ‘배우 문근영’에 더 안테나를 세우고 싶었던 기자에겐 못내 섭섭하고 아쉬운 분량이 아닐 수 없었다. 세세히 밝힐 순 없지만, ‘사도’ 속 혜경궁 홍씨는 남편 사도와 아들 정조 사이에서 선택을 강요받는 딜레마를 겪을 뿐, 드라마를 리드하는 핵심 플롯의 주체는 아니었다.

물론 이런 상황이 문근영 개인의 허물은 아닐 것이다. 언제부턴가 여배우 영화가 기획되지 않고 씨가 마르다 보니 실력 있는 많은 여배우들이 개점휴업 상태에 놓이거나 서브플롯으로 남자 주인공을 받쳐주는 역할에 만족한지 오래됐기 때문이다. ‘집으로 가는 길’의 전도연, ‘해적’의 손예진 같은 복 받은 케이스도 간혹 있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상위 5%의 얘기일 뿐 현실은 훨씬 냉혹하다.
올해 CJ엔터테인먼트와 쇼박스 투자 팀장이 모두 여성으로 물갈이됐지만, 안타깝게도 여배우들의 처우가 당장 개선될 것 같지는 않다. 연봉 협상과 전임자 보다 향상된 실적을 보여주려면 아무래도 이들이 모험 보단 기존의 ‘안전빵’ 투자 관행에 기댈 가능성이 더 높기 때문이다. 이 말은 당분간 최민식부터 김수현까지 일부 검증된 소수의 남자 배우들만 더 바빠질 거라는 얘기이기도 하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충무로에서도 ‘여자의 적은 여자’라는 우스개가 결코 공허하게 들리지 않는다.
문근영의 ‘사도’ 출연을 놓고 영화계에선 그녀의 하향세, 저공비행과 연관 짓는 목소리도 나온다. 한때 국민여동생 덕을 보며 승승장구했지만 성인이 된 뒤엔 오히려 이 부담스런 타이틀 때문에 성인 연기를 보여줄 찬스를 번번이 놓치고 있다는 지적이다. 그녀가 또래 중 최고의 연기파인 건 맞지만, 동안 이미지가 워낙 강하다보니 새로운 캐릭터를 맡는 게 다른 배우들 보다 곱절 힘들다는 의견도 나온다. ‘귀여움’을 넘어 ‘청순’까진 되는데 ‘섹시’나 ‘팜므파탈’은 안 되는 문근영의 콤플렉스다.
소속사와 문근영도 이 난제를 해결하기 위해 달력만 쳐다본 건 아니다. 짙은 스모키 메이크업 화보도 찍어봤고, 파격적인 스트립 걸로 연극 무대에도 서봤다. 하지만 그때마다 ‘넘보고 싶은 여자 문근영’ 보단 ‘몰래 엄마 화장품 바른 중딩 같다’는 야속한 댓글만 달렸다. 기자도 대학로에서 문근영의 연극을 봤지만 야릇한 의상에 봉을 잡고 관능적인 춤을 추는 문근영의 모습이 너무 낯설고 서글픈 마음까지 들어 그 부분에선 눈을 감고 말았다.
모든 선택엔 기회비용과 대가가 따르게 돼있고 세상에 공짜 점심은 없는 법이다. 문근영은 자신의 의도와 달리 장나라를 밀어내고 국민여동생이 됐고, 수년간 메이저 광고를 독식하며 전성기를 보냈다. 최고의 상품으로 부가가치를 창출했지만, 피겨 여왕 김연아가 등장하며 국민여동생 왕관을 넘겨줘야 했다. 국민여동생은 둘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자신의 입으로 한 번도 국민여동생이라고 말한 적이 없는 문근영은 그래서 지금 더 허탈한 박탈감을 느끼고 있을지 모르겠다. 보고 싶은 것만 보려하는 대중과 문근영 간의 일종의 불협화음이다.
이제 겨우 스물일곱. 더 부딪치고 아프고 깨져도 금세 치유되는 아름다운 나이다. 비슷한 성장통을 겪었을 다코타 패닝처럼 메이저와 인디 영화를 수시로 오가며 다양한 경험을 쌓는 것도 좋겠고, 흥행이나 시청률에 연연하지 않는 대범하고 여유로운 배우로 성장했으면 더 좋겠다. 최근 이별의 아픔을 겪었지만 마음을 닫지 말고 더 좋은 남자를 최대한 많이 만나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 워낙 어릴 때부터 칭찬과 환호에만 익숙해있을 문근영에겐 지금 젖살 빠지는 것만큼이나 안 쓰던 근육을 써보는 일이 중요할 것이기 때문이다.
내친김에 하나 부탁하고 싶다. 공개 연애 여부는 본인의 선택이겠으나 결혼에 대한 확신이 들기 전까진 남자와 공항에서 카트는 같이 밀지 않았으면 좋겠다. 임팩트가 강해 잔상에 오래 머물고, 혹시라도 헤어졌을 때 남자에 비해 더 스크래치가 클 수 있기 때문이다. 이건 국민여동생이 아니라 그냥 여동생 같아서 하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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