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계상 ‘레드카펫’ 종량제 봉투에서 핀 한 송이 장미
OSEN 손남원 기자
발행 2014.10.17 06: 58

[OSEN=김범석의 사이드미러] 기대치와의 싸움이란 점에서 영화는 종종 스스로가 1차 극복 대상이 되곤 한다. 과열된 기대치가 예기치 않게 흥행의 걸림돌로 작용하는 일이 많지만 간혹 이와 정반대의 길을 걷는 영화도 나타나게 마련이다. 윤계상 고준희 주연 ‘레드카펫’(박범수 감독)은 굳이 따지자면 후자에 속하는 영화다.
 오죽 경쟁력이 없었으면 발효 음식도 아닌데 창고에서 1년 묵었다가 지각 개봉을 할까, 또는 150편 넘는 에로영화 감독의 첫 장편 상업 데뷔작이라는 일부 부정적인 선입견만 걷어낸다면 ‘레드카펫’은 그다지 나쁘지 않은 영화다. 물론 KBS 드라마 스페셜에 딱 어울리는 단막극 소재이지만, 이 영화가 말하려 하는 주제의식인 3류 인생들의 따뜻한 현실 극복기가 예상을 깨고 뭉클한 울림을 선사한다.
 정우(윤계상)는 월급과 4대 보험이라는 달콤한 현실에 발목 잡혀 10년간 에로 영화를 찍지만, 꿈은 청룡영화제 신인감독상 수상이다. 믿었던 선배에게 시나리오를 도둑맞은 아픈 전력이 있는 그는 그래서 메이저 상륙을 위해 야심차게 준비하는 순수 멜로 ‘사관과 간호사’ 집필에 열중한다.

그런 정우의 인생에 어느 날 아역 탤런트 출신이지만 현실은 보잘 것 없는 은수(고준희)가 불쑥 끼어든다. 불편한 동거인에서 연인으로, 다시 3류 감독과 톱스타로 인생 희비 곡선이 몇 차례 엇갈리지만 둘은 모두의 예상대로 ‘사관과 간호사’로 예술적 동지가 되며 사랑과 인생의 참 의미를 깨닫게 된다. 후반부 부산 태종대 지역 영화제에서 극적 재회하는 두 남녀의 모습은 비참한 현실에 고개를 파묻은 많은 루저들에게 작은 위로가 될 것 같다.
그러나 단어의 나열이 결코 시가 될 수 없는 것처럼, 레디 액션을 외친다 해서 모두 영화가 되는 건 아닐 텐데 ‘레드카펫’은 그런 점에서 무모할 만큼 용감하다. 에로 영화 제작 현실을 코믹하게 셀프 디스하며 웃음을 유발, 부족한 개연성을 메우려는 시도는 좋았지만 곳곳에서 이야기 흐름이 푹 꺼지는 싱크홀 현상을 노출하고 만다. 어느 정도 철근을 심어놓고 시멘트를 부어야 했는데 설계도와 기초 공사를 너무 소홀히 한 탓이다.
예컨대 정우가 자력과 자의식으로 에로계를 벗어나 흠모하던 박찬욱 같은 세계적 연출자가 된다는 설정은 이해되지만, 드라마의 서브 동력인 은수와의 갈등과 봉합 과정은 비약과 생략으로 일관하다 보니 맥이 툭툭 끊겼다. 이처럼 최소한의 개연성이 부족하고 배우들 연기 또한 깊이가 없다보니 그러려니 대충 넘어가야 하는 불친절한 대목이 많았다.
 또 중간 중간 통편집 한 결과겠지만 이야기의 점프가 너무 많고 인과관계가 허술하다 보니 주인공 감정과 관객이 따로 노는 단절감도 여러 곳에서 느껴졌다. 에로 배우와 제작진이 상업 영화 현장에 알바를 갔다가 멸시당한 뒤 술집에서 옆 테이블 손님들과 시비 끝에 패싸움을 벌이는 장면도 그 중 하나였다.
 얼마든지 이들의 진정성을 호소하며 페이소스를 불러일으킬 수 있는 설정이었지만 앞 부분을 대거 편집하다 보니 이도저도 아닌 신이 되고 말았다. 관객은 그런 속사정까지 이해해줄 만큼 너그럽지 않을 텐데 ‘레드카펫’은 지나치게 관대함을 바라는 게 아닐까 싶어 아쉬웠다.
 동네 모텔에 가서 하얏트호텔의 서비스와 어메니티를 기대하면 안 되듯, 김밥천국에서 유기농 단무지를 원하면 눈총받기 마련이다. ‘레드카펫’을 본 뒤 감동과 카타르시스가 부족하다며 1점 테러를 해선 안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기대를 말끔히 비우고 봤을 때 최악이 아니라는 것일 뿐, 19금 어벤져스 군단 운운하는 마케팅 낚시는 각자 판단에 맡긴다. 2차 판권 회사 KTH가 참여한 만큼 23일 극장 개봉과 함께 곧 IP TV로 풀릴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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