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 삶과 예술에 대한 우아한 고찰 [리뷰]
OSEN 김윤지 기자
발행 2014.10.31 09: 59

"예술 보단 삶이다." 인생은 짧지만 예술은 길다는, 죽음을 앞둔 남자의 말에 의사는 이렇게 대답한다. 예술과 삶은 영화 '봄'을 관통하는 키워드다. 삶의 의미를 예술에서 찾고, 예술은 삶을 완성한다. '봄'은 느리지만 진지하게 이 두 가지 주제에 접근한다.
배경은 1960년대 말 시골 마을. 성공한 조각가 준구(박용우)는 죽음을 앞두고 무기력한 생활을 이어간다. 아내 정숙(김서형)은 우연히 만난 마을 아낙 민경(이유영)이 남편에게 예술적 영감을 불어넣으리라 생각하고, 민경에게 누드 모델을 제안한다. 힘겹게 살아가던 민경은 돈 때문에 이를 승낙하지만, 준구와의 작업을 통해 생의 활기를 찾아간다. 이는 준구도 마찬가지다. '봄'은 이처럼 자신만의 '봄'을 찾아가는 이들의 이야기다.
영화는 '노출=치정'이란 공식에서 벗어난다 조각가와 누드 모델이 등장하지만, 준구에게 민경은 하나의 피사체다. 준구와 민경은 서로를 이해하고 존중하며 우정을 쌓지만, 이성적 호감에 기인하지 않는다. 정숙도 그런 두 사람 사이를 의심하고 질투하지 않는다. 카메라가 민경의 몸을 담아내는 방식도 마찬가지다. 민경 역의 이유영이 극 중 전라 노출을 불사하지만, 자극적이거나 야릇한 분위기는 자아내지 않는다. 건강하고 아름다운 육체일 뿐이다.

대신 그들의 슬픔에 집중한다. 준구는 점점 다가오는 죽음을 자각하고, 정숙은 남편을 잃는다는 사실이 두렵다. 민경은 가난과 폭력 아래 놓여 있다. 그들은 소리내 울거나 분노하지 않는다. 자신의 감정을 꾹꾹 누르며, 상황을 묵묵히 받아들인다. 김서형의 절제된 연기는 특히 빛난다. 남편을 향해 미소짓지만, 웃고 있는 입과 달리 눈엔 슬픔이 어려 있다. 전라노출을 불사하고 말간 얼굴로 영화에 따스함을 불어넣는 신인 이유영도 '봄'의 발견이다.
한 폭의 수채화 같은 화면들은 '봄'의 미덕이다. 고풍스러운 한복에 양산과 사첼백을 쥐고 논길을 걷는 정숙의 모습은 클로드 모네의 '양산을 쓰고 오른쪽으로 몸을 돌린 여인'을 떠올리게 한다. 정숙이 늦은 밤 춤을 추는 듯 다리 위를 걸어가는 장면은 정숙의 슬픔과 농촌마을의 정취를 그대로 담아낸다. 서울대 서양화과를 졸업한 조근현 감독은 미술감독 출신이다. 그는 기자간담회에서 "왜 촬영에 대한 질문이 없느냐"고 서운함을 드러내기도 했다.
'봄'은 정적이지만 성실하게 주제를 따라간다. 말미 반전이 기다리고 있지만, 놀라움 보다는 깨달음을 안긴다. 그제야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는 인물들의 모습은 애처롭다. 근래 보기 드문 착하고, 서정적인 영화다. 아리조나국제영화제, 밀라노국제영화제 등 각종 해외영화제에서 최우수 작품상과 여우주연상 등 8관왕을 기록한 데는 이유가 있다. 다만 요즘 관객들에겐 지나치게 잔잔한 영화가 될 수 있다.
 
조근현 감독의 전작인 영화 '26년'의 한혜진, 임슬옹, 진구, 배수빈이 카메오로 출연한다.
내달 20일 개봉. 청소년 관람불가. 
jay@osen.co.kr
'봄' 포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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