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시장’ 윤제균 감독과 철지난 선풍기
OSEN 최나영 기자
발행 2014.11.22 10: 54

[OSEN=김범석의 사이드미러] 윤제균 감독은 요즘도 철지난 선풍기를 끼고 산다. 원래 열이 많은 체질인 탓도 있지만 두 평 남짓한 사무실 창문에 바짝 붙어 담배연기를 실외로 실어 나르기 위한 목적이 더 크다. 지난주 불쑥 방문해 그를 만났을 때도 그는 창가에 매미처럼 최대한 몸을 밀착시킨 채 흡연 중이었다.
2년 전 여름 통풍 진단을 받은 뒤 아주 잠깐 전자 담배를 피웠을 때를 제외하고 그 역시 금연에 관한한 대한민국 의지 박약자 중 한 명인 셈이다. ‘감독님 왜 그토록 담배를 못 끊어요’라고 물으면 그는 항상 ‘그러게요, 세상이 담배를 피우게 만드네요’라며 멋쩍어 한다. 투자사에서 경상비를 지원받는 몇 안 되는 영화사 오너 겸 흥행 감독이 대체 무슨 고민과 꿍꿍이가 많을까.
윤제균 감독을 처음 본 건 ‘두사부일체’를 촬영하던 수원공고 근처였다. ‘신혼여행’이라는 시나리오로 공모전에 입상한 윤제균은 각본가 출신이지만, 심마니라는 영화 펀드를 운영하던 투자쪽 사람이기도 했다. 그런 그가 자기가 쓴 ‘두사부일체’로 감독에 도전한다니 이게 무슨 용기인가 싶어 호기심이 일었다.

고려대 상대를 나와 누구나 선망하던 대기업 광고회사에 들어갔지만 IMF와 적성에 안 맞아 자의 반 타의 반 퇴사한 그는 재취업 대신 과감히 작가의 길을 택했다. 말이 좋아 작가이지 연봉 300만원도 안 되는 비자발적 실업 상태였다. 더군다나 홀몸도 아니고 그에겐 처자식이 있었다. 죽더라도 쓰다가 죽겠다는 각오로 자판을 두드렸고, 그 첫 결실이 2000년 ‘신혼여행’으로 완성됐다. 학교를 접수한 조폭 ‘두사부일체’ 계두식은 그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놓았다.
‘낭만자객’으로 일찌감치 예방접종을 한 덕분일까. ‘색즉시공’ ‘1번가의 기적’ ‘해운대’ 등 그가 세상에 내놓은 작품들은 늘 화제가 됐고 흥행가도를 달렸다. 초기 감독 시절 화장실 유머와 섹스 코드를 즐겨 써 영화계에서 ‘쌈마이’ 감독이라는 꼬리표가 붙기도 했지만 정작 본인은 그런 닉네임을 전혀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자신은 고급스런 ‘아트’보다 사람들이 좋아하는 대중성 있는 영화를 만들고 연출하는 게 더 좋다고 입버릇처럼 말한다.
언제부턴가 ‘해운대’ ‘국제시장’ 같은 빅 버짓 영화를 연출하는 것도 박찬욱 봉준호가 되고 싶어서가 아니라 세상을 보는 시야와 관심이 넓어지다 보니 자연스럽게 그렇게 된 것일 뿐, 자신은 여전히 화장실 유머를 좋아한다며 낄낄댄다. 5년 전 연예계에 코스닥 광풍이 불 때 회사 지분을 넘겨 50~60억원을 앉아서 벌 수도 있었지만 그는 딱 이틀 고민해보더니 ‘죄송하다’며 제안을 거절하기도 했다.
내심 더 매력적인 프로포즈가 있나 보다 생각했지만 그게 아니었다. 한참 뒤 거절 이유를 물었더니 ‘세상에 공짜 점심은 없고 그걸 받는 순간 감독 인생은 쫑난다’고 답했다. 아닌 게 아니라 당시 몇 억에서 몇 십억을 받고 회사 지분을 넘긴 영화인들은 지금까지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다. 순간의 달콤함에 취해 판권과 아이템 등 영화인의 영혼을 죄다 팔아버린 후유증인 것이다.
순풍만 있는 줄 알지만 윤제균에게도 위기가 비껴가지 않았다. 한때 계약한 작가와 감독이 20명이 넘지만 지금은 거의 남아있지 않을 만큼 엎어진 프로젝트가 즐비하다. 이명세 감독을 교체하는 과정에서도 많은 잡음이 있었다. 대감독을 모셔놓고 후배가 할 행동은 아니었다는 뒷말도 나왔다. 실수로 나온 영화라는 혹평을 받은 ‘7광구’로 체면을 구기기도 했고 ‘히말라야’ 주인공이 김명민에서 황정민으로 바뀌는 진통도 겪어야 했다.
그런 위기나 슬럼프 때마다 윤제균은 자기를 내려놓고 가장 상식적인 해결책을 찾는다. 주위 사람들에게 충분히 조언을 구하고 자신이 손해봐야 할 땐 철저하게 피해자가 되는 쪽으로 가장 악랄한 해법을 자초한다. 그렇게 완벽하게 지면 최소한 다시 일어설 힘과 지렛대가 생긴다는 걸 체득한 결과일 것이다.
최근 배우 신이의 다큐멘터리에 윤제균이 출연해 속내가 궁금했다. 대작 개봉을 앞두고 굳이 안 해줘도 될 것 같은 프로에 왜 응해줬을까. 정작 신이와는 통화도 안 한 상태였다는데. 다큐 제작진이 신이에게 ‘당신을 위해 누가 인터뷰를 해줄 수 있을까’ 물었고 신이가 ‘죄송하다. 한 명도 안 떠오르는데 어쩌면 윤제균 감독님이 해주실 지도 모르겠다’고 했단다. PD에게 속사정을 전해들은 윤제균은 투자사 CJ의 만류에도 다큐 제작진을 영화사로 초대했다.
JK필름 식구들이 이를 알면 못 하게 할까봐 그들에게도 알리지 않고 조용히 인터뷰에 응했다는 얘기를 듣고 그의 마음씀씀이에 잠시 숙연해졌다. “만약 신이가 성형한 뒤 배우로 잘 풀렸다면 인터뷰 못 해줬을 겁니다. 그런데 그게 아니잖아요. 이럴 땐 응원해줘야 맞는 거잖아요.” 영화는 어쩔 수 없이 감독을 닮는다고 했던가. 몇 년 전 투병하던 부친을 떠나보내고 속죄하듯 눈물 흘리던 윤제균이 아버지를 그리며 만들었을 ‘국제시장’이 벌써부터 보고 싶다. 철지난 선풍기도 옆에서 그를 응원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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