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생’ 이성민과 눈물의 대패 삼겹살
OSEN 손남원 기자
발행 2014.12.22 07: 31

[OSEN=김범석의 사이드미러] 추억의 ‘TV 손자병법’ 이후 샐러리맨의 애환을 잘 그려낸 드라마로 꼽힌 tvN ‘미생’이 진한 여운을 남기고 20일 막을 내렸다. 한 계약직 사원의 시점으로 본 무역회사의 일그러진 초상은 넥타이족을 비롯한 이 세상 모든 을의 공감과 공분을 사며 매회 시청률을 갈아치웠다.
전직 바둑 기사 장그래의 시선과 내레이션이 ‘미생’의 맥거핀 역할을 했다면, 이 드라마의 배경화면 역할을 한 리베로는 바로 오상식 차장 이성민이었다. 웹툰에서 방금 걸어 나온 것 같은 충혈된 눈과 까치집 지은 머리까지 오차장을 완벽하게 재해석해낸 이성민이 다시 한 번 대중문화의 핵으로 부상하고 있다. 벌써 광고도 네 편이나 계약했다.
이성민과 작업해본 사람들에게 들어본 그의 매력은 좀 다채로웠다. 공통적으로 나오는 의견은 대체로 인간적이고 겸손하며 성실한 태도를 가진 남자라는 점이었다. 그의 인간성과 배우로서의 진정성이 드러나는 순간이 바로 리허설 때라는 한 영화사 프로듀서의 귀띔이 흥미를 돋웠다.

 대개 주연급 배우들 정도 되면 힘을 비축해뒀다가 본 촬영에 쏟아 붓기 마련인데 이성민은 리허설 단계부터 에너지를 풀가동한다고 한다. 간혹 일부 주연급들은 애드리브를 구사하며 합의된 리듬과 템포를 끊고 상대 배우의 대사와 감정을 잘라먹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이성민은 오히려 상대를 더 살려주고 띄워주는 배우라는 얘기도 나왔다.
 “리허설 전부터 상대 배우와 앉아 폭풍 수다를 떠세요. ‘밥 먹었냐’부터 ‘요즘 고민이 뭐냐’까지 정말 관심이 많으신데 그게 다 후배를 편하게 다독여주려는 거더라고요. 대사와 호흡도 ‘내가 이렇게 치고 들어가면 넌 어떻게 받을 거냐’를 꼭 물어보고 확인을 받아요. 리허설에서도 꼭 그렇게 하시죠. 그러니 NG가 날 일이 거의 없는 거예요. 어떨 땐 신에 대해 감독 보다 더 시야가 넓고 깊으세요. 주연이 저렇게까지 안 해도 될 텐데 굳이 그분은 다른 현장에서도 그렇더라고요.”
개중에는 그다지 친절하지 않은 배우라는 평도 있었다. 오만하거나 사람이 바뀌었다는 게 아니라 타인에게 과한 친절을 베풀지 않는다는 증언이었다. 현장에 도착해도 ‘나 왔어’ 하며 손만 한번 흔들 뿐 감독에게 다가가 담배를 권하며 친한 척하지 않는다는 얘기였다. 보통 강자에게 약하고 약자에게 강하기 마련인데 이성민은 반대였다. 자기 포지션에 정위치 한 뒤 대본을 점검하고 대화를 나누는 이가 상대 배우와 조감독 정도라고 한다.
‘미생’에선 애주가로 나왔지만 실제론 술을 분해하는 효소가 부족해 거의 술을 마시지 않는 비주사파였다. 기린 맥주 마니아인 송강호 앞에서도 제사를 지낼 만큼 미약한 주량의 소유자다. 커피를 즐기는 이성민이 유일하게 술을 마실 때는 대학로에서 후배들을 만날 때다. 한 연극배우의 증언이다.
 “한번은 성민이 형이 극단 연습실에 불쑥 들렀어요. 한 손에 아메리카노 테이크아웃 잔을 들고 오셨는데 순간적으로 아차 싶은 표정으로 나가신 뒤 저희들 주려고 커피를 수십 잔 사오셨더라고요. 성공한 선배와 아메리카노 한 잔의 여유를 한없이 부러워할 저희들의 시선을 눈치 채고 곧장 행동에 옮기신 거죠. 원래 술 안 드시는 거 다 아는데 본인이 그러면 저희가 편하지 않으니까 그날만큼은 과음하세요.”
한때 대학로에서 어린이 극단을 운영하기도 한 이성민은 임대료와 인건비 부담에 빚만 잔뜩 진 채 사업을 접어야 했다. MBC 메디컬 드라마 ‘골든타임’(12)으로 생활이 피기 전까지만 해도 수도권 다세대주택에 세 식구가 살았고 첫 주연 영화 ‘방황하는 칼날’을 찍으며 김포 근방의 아파트로 이사할 수 있었다. 삼겹살 먹고 싶다는 초등학생 딸에게 대패 삼겹살을 사주며 속으로 눈물도 많이 삼켰을 거라고 한 지인은 말했다.
“형도 영락없는 딸 바보예요. 스케줄 없는 날은 딸과 한강에서 자전거를 타세요. 마포까지 오는 날이면 친한 영화인들 사무실에 들러 커피 마시며 이런저런 얘기 하는 걸 가장 좋아하시죠. 배우로서 눈빛이 참 좋잖아요. 그런 눈빛 아무나 나올 수 없는 거거든요.”
송강호 이선균과 같은 소속사인데 이 회사 매니저들은 이성민의 깐깐한 개런티 원칙 때문에 고민이 많다고 한다. 자신의 출연료를 갑자기 올리지 말라는 신신당부 때문이다. 좀 떴다 싶으면 몸값을 1~2억씩 올리기 마련인데 이성민은 ‘그러다 한방에 훅 간다’며 절대 오버하지 말라고 부탁한단다. 어떨 땐 제작사에서 제시하는 액수를 이성민이 ‘너무 과하다’며 오히려 낮출 때도 있을 정도다.
‘골든타임’ 출연 당시 현장에서 대사를 고쳐 ‘이성민도 주인공 되니까 별 수 없다’는 소문이 돌았지만 사실과 달랐다. 당시 작가와 PD가 극 전개 방향을 놓고 갈등이 생겼고 작가가 써준 대본을 PD와 스크립터가 허락 없이 수정하며 엉뚱하게 이성민이 대사를 고친 장본인처럼 루머가 퍼진 것이었다.
자신 보다 상대를 돋보이게 해주려는 반사판 정신을 가진 배우, ‘군도’ ‘손님’ 등 촬영하다 보면 어느새 분량이 늘어나 있는 실력파 배우 이성민은 요즘 ‘미생’ 팀과 세부로 여행 갈 생각에 소풍 앞둔 아이처럼 들떠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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