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정 같은 소리’ 잔소리 버럭 부장과 새가슴 인턴의 ‘오늘도 무사히’
OSEN 손남원 기자
발행 2015.11.23 07: 35

[OSEN=김범석의 사이드미러] 수습 대신 유독 견습이라는 단어를 고수해온 언론사가 있다. 문제는 견습의 견(見)이 보고 배우는 게 아니라 개(犬)를 뜻한다는 인격 비하 우스개가 늘 따라붙는다는 사실. 그만큼 이 기간 동안 사람대접 받기 어렵고, 견습 꼬리표를 떼는 과정이 시집살이처럼 험난하다는 의미일 게다.
‘또라이’ 기질 다분한 도라희(박보영)도 천신만고 끝에 붙은 동명일보 인턴 기자 생활이 어쩐지 순탄치 않아 보인다. 층층시하 선배들 챙기는 것도 피곤하지만 데스크 하재관(정재영) 부장 비위 맞추는 일이 설악산 공룡능선 타는 것만큼 고단하고 힘겹다. 걸핏하면 고함에 ‘열정만 있으면 못할 게 뭐가 있냐’며 목에 핏대부터 세우는 전형적인 돌격 앞으로 스타일.
이러다 제 명에 못 죽겠다 싶은 도라희는 결국 ‘수습도 사표를 쓰나요’라고 지식인에게 물어보는 지경까지 이르고 조용히 튈 타이밍을 노린다. 그런데 하필 그때 ‘땜빵’ 취재 명령이 떨어질 게 뭐람. 한류 톱스타의 의문스런 입원 내막을 취재하라는 데스크의 오더. 얼떨결에 VIP 병실에 잠입한 도라희는 커튼 뒤에서 기획사의 불온한 꿍꿍이와 스타의 열애 사실을 알게 되고, 많이 본 뉴스 1위 기사를 쓴 특종 행운아가 된다.

덕분에 잘리지 않고 기자증을 목에 건 도라희는 서서히 웰컴 투 연예계의 묘미를 알아가지만 ‘알 권리’와 ‘아는 재미’ 사이에서 어쩔 수 없는 직업적 고민에 휩싸이게 된다. 올곧은 기사를 써야 한다고 믿는 도라희와 당장 팔리는 것부터 쓰라고 윽박지르는 데스크의 충돌이 위험 단계에 접어들 즈음, 연예부 해체 위기가 찾아든다. 재관은 부서를 살리겠다는 다급함에 과거 자신이 취재한 한류 스타 성폭행 사건 파일을 뒤지고, 마침 라희도 이에 대한 진실에 접근하게 되는데.
‘열정 같은 소리 하고 있네’는 시급 알바로 대표되는 열정 페이의 부당함과 폐해를 다루는 사회 고발 영화가 아니다. 그렇다고 싸구려 위로와 희망 고문에 지친 20대 청춘의 세상을 향한 어퍼컷은 더더욱 아니다. 초중반 꽤 여러 번 웃음 잽을 날리는 이 코미디는 그러나 5부 능선쯤부터 갑자기 연예계 사건 사고에 초점을 맞추며 웃음기를 스스로 거둬들인다.
물론 이 과정이 이질적이거나 느닷없진 않지만 그다지 매끄럽지 않다는 게 함정. 이 영화가 대체 뭘 말하려는지 종착역이 혼돈스러워지는 것도 바로 이 지점부터다. 자기밖에 모르고 소리만 지르던 버럭 부장이 알고 보니 가엾은 기러기 아빠에 후배들을 눈물 나게 아끼는 속 깊은 선배로 비춰지는 중반 이후 모습이 적잖게 작위적으로 다가오는 것도 이 때문이다.
청렴함을 강조하려면 촌지 뿐 아니라 고급 요리집 향응 접대도 일체 사양해야 하지만 ‘어차피 좋은 게 좋다’고 믿는 재관은 이 점에서 어느 정도 때 묻은 경계선상의 인물에 더 가깝다. 화이트보드에 잘 써줘야 할 사람, 손봐야 할 사람을 나눠 이분법적 영업 마인드로 부서를 운영해온 그가 아니던가. 편집 과정에서 일부 에피소드가 뭉텅이로 빠진 건지, 아니면 애초부터 시나리오의 결함 탓인지 불분명하지만 캐릭터 고민의 심도가 낮았거나 뒤늦게 수정한 흔적으로 여겨진다.
그럼에도 이 영화가 오차 범위를 벗어나지 않고 중심을 잡은 건 정재영 박보영의 케미 덕분이다. 정재영은 실제 성격이 저렇지 않을까 싶을 만큼 괴팍하면서 인간미 있고, 카리스마 넘치면서 유머러스한 인물을 잘 표현했다.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고 여러 가면을 상황에 맞게 바꿔 쓸 수밖에 없는 중간 관리자의 고충과 애환도 무리 없이 잘 보여줬다.
박보영 역시 어디에나 있을 법한 사회 초년생의 패기와 좌충우돌, 갈등과 딜레마를 다채로운 표정에 담아내며 20대 여배우 대표 주자로서 손색없음을 입증했다. 감정의 진폭이 크진 않지만 두려움과 분노, 작은 성취감을 만끽할 때 등 다양한 감정을 오버하지 않으며 표현하는 게 쉽지 않았을 텐데 그때마다 무서운 집중력을 발휘했다. 본인 역시 ‘과속스캔들’ 이후 소속사를 옮기며 험악한 내용증명이 오갔는데 이 영화를 찍으며 그 때 외줄 타는 심정이 떠올랐을 것 같다. ‘애자’ ‘반창꼬’의 정기훈 감독의 세 번째 영화다. 15세 관람가로 25일 개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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