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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은퇴 최희섭이 말하는 파란만장 야구인생

[OSEN=이선호 기자]빅초이 최희섭(35)이 2015시즌을 끝으로 KIA 유니폼 벗었다. 한국인 최초의 메이저리거 타자로 파란만장한 야구인생을 걸어왔다. 그의 야구는 사람의 인생처럼 화려한 성공도 했지만 그만큼의 좌절과 방황도 많았다. 이제는 일반인 최희섭으로 새로운 인생을 시작한다. 거취는 정해지지 않았지만 일단 내년 미국에서 연수를 계획하고 있다. 마지막 선수생활을 했던 2015년을 보내는 최희섭에게 자신의 야구인생을 들어보았다. (질문 인터뷰 없이 최희섭을 말한 내용을 그대로 정리했다).

◆설레는 미국행과 지옥의 마이너리그

고교(광주일고)를 마치고 해태에 입단하지 못한 이유는 (박)찬호형 때문이었다. 스카우트 분들과 아버지가 1년 내내 거의 매일 만났다. 그런데 어머니는 나를 메이저리거로 만들고 싶은 의지가 크셨다. 고려대에 입학해 미국가서 야구하는 것이 맞다고 생각하셨다. 해태에 왔으면 모든 기록을 갖고 있던가 아니면 해태에 적응을 못했을 수도 있다. 그때 이종범 선배님이 저의 집에 오셔서 "해태 오라. 내가 룸메이트하면서 잘 보살피겠다"고 스카우트 제의까지 하셨다. 그런데도 어머니가 흔들리지 않았다. 그래서 대학교때 시카고의 제의를 받고 미국으로 갔다.

미국행 비행기에서는 한숨도 자지 않았고 성공하겠다고 다짐했다. 집을 떠나면서 "부모님이 돌아가셔도 못들어온다"고 말씀드렸다. 그때 부모님이 많이 우셨다. 메이저리거 될때까지 한국에 가지 않겠다고 각오했다. 마이너리그 4년 동안 가장 잘했다. 싱글. 더블, 트리플 모두 다 뛰었다. 고교 1학년부터 2002년까지 8년이 나에게는 전성기이었다. 메이저리그를 갈 수 있는 발판이었다. 실제로 미국 들어가서 4년만에 들어왔다

마이너리그는 힘겨운 시간이었다. 처음에는 홈런치고 열심히 뛰지 않거나, 2루에서 병살을 막는 슬라이딩 안하거나, 콜플레이도 안하면 혼이 많이 났다. 콜플레이는 '마이볼(My ball)'이 아니라 '아이가릿(I got it)'이었다. 이 단어를 익히느라 너무 힘들었다. 팬들에게도 들릴 정도로 소리 지르고 크게 제스처해야 한다. 파울타구 치고 안뛸 때도 혼났다. 그때마다 감독이 나를 불러 "한 번만 더 그러면 한국 보낸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이런 일을 당하면서 몸에 배였다.

클럽하우스에서 따돌림도 당했다. 동료들은 말도 걸지 않고 외면했다. 얼마나 외로웠겠는가. 그래서 정말 4년 동안 정말 죽을 힘을 다했다. 실력을 보여주니까 그들이 다가오기 시작했고 스스럼 없이 동료 대접을 해주었다. 특히 나를 영입한 (짐 핸드릭) 단장이 많은 관심을 주었다. 루키부터 시작했는데 그 덕분에 고속으로 메이저리그에 올라갔다. 에이전트 이치훈, 권윤민이 그때의 나에 대해 가장 잘 안다. 윤민이도 포수로서 너무 힘들어했다. 룸메이트도 하고 같이 살기도 했다.

◆꿈의 메이저리그 생활과 좌절

2002시즌을 마치고 짐을 싸서 집으로 가려고 했는데 메이저리그에서 콜업 전화가 왔다. 시카고로 오라는 것이었다. 가보니 마이너리그와는 완전히 다른 세계였다. 강정호와 추신수도 느꼈겠지만 내가 그 경험을 처음으로 했다. 모든 것이 신기했다. 게임 끝나고 맥주마시고 음식도 실컷 먹었다. 야구선수로 최상의 대접을 받았다. 가지 않으면 느끼지 못한 것들이었다. 먹고 자고 야구장에서 움직이는 것은 하늘과 땅 차이이다. 시카고팬들도 열성적으로 나를 응원해주었다. 한국인 최초의 메이저리거 타자라는 자부심도 컸다. 마치 구름위에 떠 있는 꿈같은 시간들이었다.

메이저리그에서 받은 한달 연봉이 마이너리그 4년치였다. 마이너에서는 너무 짜다. 계약금(72만 달러)으로 생활했다. 2주에 1200달러를 받았다. 최저 300달러도 받은 적도 있었다. 계약금을 많이 주는 이유가 메이저리그까지 가는 동안 생활하라고 주는 것 같았다.  메이저리그는 선수들이 불평불만이 없도록 만든다. 살아남는 선수들만 대우를 해주니까 들어가려고 노력한다. 우리도 야구잘하면 최고의 대우를 해주어야 한다. 그래야 선수들이 그 자리를 가려고 열심히한다.

트리플에서는 야구가 마음대로 이루어졌다. 그런데 메이저리그에 가는 순간 막히더라. 홈런도 때렸지만 나보다 한 수 위의 야구선수들이었다. (수비도중 넘어져 당한) 뇌진탕 등 여러가지 이야기가 나오는데 솔직히 실력에서 버거웠다. 투수들을 상대했는데 내가 이기지 못하는 볼이었다. 트리플 투수들은 극복했는데 투수들이 평균 150km 던지면서 제구력이 되니까 치기 힘들었다. 이것이 두 번의 트레이드와 두 번의 방출로 이어진 이유였다.

그때 투수들이 지금보다 훨씬 좋았는데 스테로이드를 했던 이유도 있다. 당시 투수들이 스테로이드를 많이 했을 때라서 동료들이 "너는 피해자다"고 말한게 기억난다. 나는 스테로이드를 안했기 때문이었다. 정정당당하게 깨끗하게 승부를 하고 싶었다. 미국 선수들은 라커룸에서 내가 보는 데서 주사를 놓는다. 스테로이드는 웨이트트레이닝을 하지 않아도 힘이 생기는 물질이다. 

그래도 내 모든 것을 올인했는데도 안됐다. 백업, 외야수였으면 버텼을 것이다. 1루수는 헤비급이다. 홈런 30개, 100타점은 해야 한다. 무게감이 큰 자리이다. 나는 그 레벨에 가지 못했다. 그 부분은 인정한다. 당시 꿈은 하나였다. 메이저리그 1경기였다. 한국타자는 실패한다는 곳에 가서 한번쯤을 하고 싶었다. 고교시절 이발소에서 머리 자를때 찬호형 경기를 보면서 에릭 영, 몬데시를 뛰는 것을 보았다. 그런 레전드와 경쟁해서 이겼다.

포스트시즌 경험을 못한 것이 아쉬웠다. (시카고컵스) 2003년 챔피언십 시리즈에서 3승1패로 앞서다 4승3패로 졌다. 상대가 플로리다 마린스였는데 시즌을 마치자 거기로 트레이드됐다. 2004년도 포스트시즌 진출했다. 나는 2년 모두 대기조였다. 함께 따라다니다 주전들이 부상 당하면 픽업을 받는 처지였다. 많이 아쉬웠다. 그래도 올스타  홈런 더뷔는 잊을 수 없는 추억이다. 초청선수로 참가해 올스타 선수들과 겨루었다. 

추신수는 퓨처스올스타에서 각각 시애틀과 컵스 소속으로 만났다. 신수는 유망주였고 난 4번타자였다. 운동하는 것을 봤다. 배팅하는 것을 보고 미국에서 성공할 것 같았다. 메이저리그의 1선발~3선발 투수라면 세계 최고 수준이다. 커쇼, 그레인키, 범가노 이런 친구들은 넘버원이고 야구를 위해 태어났다. 직접 그런 공들을 쳐봤다. 잘 치면 감사해야 한다. 지금 강정호와 추신수가 저런 선수들의 공을 치고 있다.

◆마지막 선택 한국행, 파란만장 KIA생활

메이저생활을 화려함 뒤에 아픔이 많이 있었다. 두 번 트레이드, 두 번 방출이 있었다. 그래도 버틸 수 있었던 것은 마이너리그 4년의 생활이었다. 방출된 후 팀을 찾지 못했다. 2007년 초반 KIA에서 함께 하자고 했고 가기로 결정했다. 당시 일본 오릭스에서 오퍼가 있었다. LA 다저스 시절 관계자와 안면이 있었다. 나는 한국에서 끝내겠다고 거절했었다. 한국에서 마지막으로 해보고 싶었다.

출전하자마자 다쳤는데 3개월동안 아무것도 하지 않고 바로 뛰다보니 몸에 문제가 생겼다. 2008년에는 사고도 있었다. 2월 전지훈련 도중 먼저 들어왔다. 강원도 강릉을 가다 교통사고를 당했다. 터널을 들어가기전에는 빗길이었는데 터널을 빠져나오자 빙판길이었다. 미처 대처하지 못했고 차는 스키처럼 미끄러졌다. 그때 지금의 아내가 많이 다쳤다. 나는 외부에 알리기 싫어 입원시키고 곧바로 서울로 돌아가 비행기 타고 광주에 내려왔다. 숨기고만 싶었다. 제대로 치료도 못했고 그때부터 허리, 어깨, 무릎이 아팠다. 후반기는 뛰지도 못했다.

몸이 너무 좋지 않아 2008 시즌을 마치고 그만두려고 했다. 말도 꺼내기도 전에 조범현 감독이 불러 "어떻게 할래. 네가 원하는대로 해주겠다. 시간을 줄터이니 니 마음대로 운동 해라. 몸을 한번 만들어보라"고 말씀하셨다. 그때 여동생이 등산으로 살을 20kg 뺐는데 "등산이 최고"라며 나에게 등산을 권유했다. 새벽 5시에 나가서 오후 5시까지 12시간씩 운동했다. 100일 동안 산만 탔더니 몸이 거짓말처럼 좋아졌다. 몸이 만들어지니 여러가지 동작도 편해졌다. 가족들에게 마지막으로 한 번 해보겠다고 말했다.

몸이 좋아졌으니 훈련이나 경기도 재미있었다. 스프랭캠프도 넉끈히 소화했고 풀타임으로 1년을 했다. 나의 목표였던 우승도 이룰 수 있었다. 우승을 끝으로  마무리 하고 싶은 생각이 있었다. 그때 주변에서는 내가 돈 때문에 그러는 줄 알고 생각했다. 처음부터 터놓고 이야기할 사람이 없었다. 이후는 부진했는데 2011시즌을 마치면서 집안과 에이전트 등 여러가지 일이 많았다. 선동렬 감독님도 새로 오셨다. 많이 고민했고 그만 두겠다고 말씀드렸다. 언론들은 은퇴파동이라고 했다. 그때 야구를 시킨 외삼촌에게 많이 혼났다. 에이전트와 구단 생각이 나를 바꾸었다. 자숙하는 것으로 정리를 했다.

2009년 우승 이후에는 제대로 KIA를 위해 뛰지 못해 올해는 정말 잘해보려고 했다. 전지훈련지에서 열심히 했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시즌 초반 잠깐 1군에 있었지만 허리 때문에 2군으로 내려갔고 이후 4개월동안 함평숙소에만 있었다. 더 이상 야구를 할 수 없다고 생각하자 은퇴를 결정했다. 김기태 감독님도 "후반기 1경기라도 뛰어야 했는데. 은퇴할 줄 알았으면 올렸어야 하는데"라고 말하셨다. 지난 5년 동안 후반기에 뛰지 못하고 끝낸 것이 죄송스럽다. 그래도 감독님이 배려를 해주신 덕분에  챔피언스필드에서도 뛰었고 홈런 100개까지 칠 수 있었다.

야구선수는 코칭스태프, 팀메이트, 언론, 프론트, 팬까지 다섯가닥의 관계를 맺는다. 미안하게도 좋은 모습을 많이 보여드리지 못해 팬들께는 죄송스럽다. 말썽이 많았던 점도 솔직히 인정한다. 코칭스태프는 조 감독님과 원만했던 것 같다. 언론도 부족한 저에게 많이 도움을 주었다. 동료들에게도 미안함을 갖고 떠난다. 은퇴하니 다른 팀 선수들에게서 많이 전화왔다. 나에게는 앞으로 살아가는데 중요한 메시지라고 생각한다. 

KIA에서 제대로 못한 만큼 다른 방식으로 여러가지 도움을 주고 싶다. KIA 같은 전통과 레벨이면 양키스 같은 명문이 되어야 한다. 선수들이 입단할때는 요미우리, 양키스에 들어온다는 기분이 들어야 한다. 야구는 우승만 하면 안된다. 레벨을 높여야한다. 대한민국 야구를 이야기하면 KIA가 되면 좋겠다. 작은 힘이나마 보탬이 되고 싶다. /sunny@ose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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