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h!쎈 초점]광화문 이승환 Vs 구치소 차은택, 갈라진 인연
OSEN 손남원 기자
발행 2016.12.07 15: 32

[OSEN=유진모의 취중한담]가수 이승환은 시사문제에 적극적으로 확고한 의견을 내는 연예인 중 하나다. 이번 ‘최순실 게이트’에도 자신의 건물에 ‘박근혜 대통령 하야’란 플래카드를 내걸면서 앞장섰고, 전인권 이효리 등과 함께 ‘길가에 버려지다’로써 국민들의 배신감과 허탈감을 달랬다.
CF 및 뮤직비디오 감독으로 유명했던 차은택은 이번 최순실 게이트의 핵심인물로 지목돼 구속수사를 받는 가운데 국정조사 청문회 증인 자리에 앉았다. 그 하루 전 SBS ‘본격 연예 한밤’은 이승환과 차은택의 인연을 다뤘다.
한때 차은택은 이승환의 신곡의 뮤직비디오를 다수 연출했다. 드라마타이즈에 강했는데 특히 ‘당부’는 업계에서 한국 뮤직비디오의 수준을 끌어올렸다는 평가를 받은 적도 있다. 그는 이효리의 신곡 뮤직비디오도 연출한 바 있다.

하지만 가요계의 주도권이 아이돌그룹으로 넘어가면서 유행이 컨셉트와 퍼포먼스 위주로 바뀜에 따라 그는 내리막길을 걸었다. 그리고 갑자기 문화융성위원회 위원이라는 타이틀을 갖고 급부상한 뒤 오늘날 벼랑 끝에 서게 됐다.
방송은 이승환과 차은택이 한 무대에 선 영상과 함께 “가요계에서 만나 함께했던 두 사람. 한 사람은 여전히 대중 앞에 서있고, 한 사람은 대중의 심판을 기다리고 있다”는 내레이션으로 마무리됐다.
이승환은 1989년 10월 ‘BC 603’이란 데뷔앨범으로 등장했다. 당시 한국 가요계는 지구레코드 오아시스레코드 서울음반 성음레코드 아세아레코드 킹레코드 등의 이른바 메이저레이블이 유통망을 쥐락펴락하고 있었기에 이 회사에 전속되거나 메이저 기획사를 통한 프로듀서메이커 시스템에 의하지 않고는 독자적인 음반발표와 활동(이를테면 독립영화 같은)이 거의 불가능하다시피 할 때였다. 독립레이블인 동아기획만이 김현식 들국화 등 소위 언더그라운드뮤지션으로 일가를 이룬 게 유일한 예외였다.
이승환은 자신이(오태호와 함께) 직접 작사 작곡 편곡 등 프로듀싱한 데모테이프가 많은 기획사와 음반사에서 퇴짜를 맞자 미리 부모로부터 상속받은 자비 중 500만 원을 들여 직접 제작하고 서울음반을 통해 유통시키는 놀라운 독립군적 행보로 첫발을 내디뎠다. 대한민국 최초의 가수 자체제작 앨범이다.
왜 이승환의 독자적 행보가 가치가 높은가는 당시 가요계의 홍보 및 활동시스템에 있다. 노래 홍보 및 가수 활동의 최고무대는 당연히 KBS와 MBC였다(SBS TV는 1991년 12월 개국). 제도권 가수에게 TV의 가요 프로그램은 가장 훌륭한 홍보의 장이었고, 라디오가 그에 못지않은 활동무대였다. 일부 발라드 가수의 경우 라디오를 더 선호하기도 했다.
지상파 방송사의 가요 PD들이 업계의 ‘큰손’들과 돈독한 관계를 유지하며 ‘슈퍼갑’의 위치에서 군림하는 구조였다. 자본력과 시스템 그리고 탄탄한 대인관계를 쌓지 못한 비제도권 가수나 기획사들이 지상파 방송에 ‘입성’하는 것은 낙타가 바늘귀에 들어가는 것보다 힘들었다.
더불어 가두판매대의 스포츠신문, 주간지, 학생지, 여성지 등이 부차적인 홍보수단으로 활용됐다. 상황이 이러니 이승환은 당연히 이단아였고 성공이 쉬울 리 없었다. 하지만 그는 약간의 시간은 걸렸지만 결국 보란 듯이 ‘텅 빈 마음’ ‘크리스마스에는’ ‘기다린 날도 지워질 날도’ 등 무려 3곡의 멀티히트를 기록하며 기존 제도권을 비웃었다.
그러자 방송국에서 오히려 몸이 달았다. 방송국에 고개를 조아릴 줄 모르는 이 독립군의 노래 리퀘스트가 쇄도하자 스튜디오로 직접 불러내 육성을 들려주고 얼굴을 보여줌으로써 시청률을 높이려는 욕구가 부글부글 끓어오른 것.
하지만 그는 TV에 거부감을 지닌 가수로 유명하다. 그는 1990년대 신승훈과 함께 쌍두마차였다. 신승훈은 라인음향이란 당시의 SM 같은 기획사에 적을 뒀기에 회사의 방침에 따라 적당하게 타협한 데 반해 이승환은 웬만해선 TV에 얼굴을 내밀지 않고 대신 라디오와 소규모 콘서트를 통해 대중과 소통했다.
대부분의 스타가수들은 신데렐라 스토리의 주인공이다. 그러나 이승환은 그들에 비교하면 ‘금수저’다. 그가 폐쇄적인 카르텔 구조로 움직이는 유기체 같은 가요계의 관행 속에서 독립투사를 연상시키는 전술로 승리의 고지를 점령할 수 있었던 배경이 바로 그가 아쉬울 게 없는 부르주아였다는 사실은 아이러니다.
그의 별명은 ‘어린 왕자’다. 현재 한국나이 52살인 그의 외모는 별명답게 아직 동안이다. 그는 타고난 부잣집 아들인 데다 음반판매 및 저작권수입으로 남부러울 것 없는 경제력을 보유하고 있다. 개인적으론 외로울지 몰라도 여전히 수많은 팬들의 사랑을 받는 화려한 스타며 무대 위를 뛰어다닐 만큼 건강하다.
그냥 ‘딴따라’로서의 직업활동을 하면서 개인적 행복만 추구한다면 이런저런 구설수에 오르거나 논란의 대상이 될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한 채 ‘배불리’ 살 수 있을 텐데 그는 돌발행동을 서슴지 않는다.
차은택은 잊혀진 유명 CF 및 뮤직비디오 감독에서 ‘절대권력’의 최측근이 돼 무소불위의 힘을 등에 업고 많은 것을 누리며 부활했지만 법의 심판을 기다리는 피의자로 급전직하했다. 여론재판은 벌써부터 ‘대역죄인’이다. 한때 다정한 콤비였던 두 사람이 왜 이렇게 각자 다른 길을 걷게 된 것일까?
이승환은 지난 27년간 뭐가 유행되건 트렌드가 바뀌건 괘념치 않고 자기만의 음악을 고수하며 외길을 걸었다. 회사를 키운다며 후배가수 양성에 잠깐 손을 대긴 했지만 이내 제자리로 되돌아와 가장 이승환답게 살고 있다. 그건 앞선 조용필의 행보와 비슷하다. 가장 훌륭한 뮤지션은 남의 음악은 잘 못한다.
차은택은 본업인 CF와 뮤직비디오 연출가에서 꽤 멀리 갔다. 한때 뮤직비디오에서 드라마타이즈를 인정받았지만 드라마에선 별로 재미를 못 본 건 작가로서의 크리에이티브가 상업적 아이디어를 넘지 못했다는 증거일 수도 있다. ‘그렇다고 작가가 지나친 돈을 넘보면 어떻게 되는지’의 거울역할도 했다.
영화 ‘밀정’에서 의열단장 정채산(이병헌)은 일본경찰 이정출(송강호)을 밀정으로 만들고자 설득할 때 “역사에 어떤 사람으로 기록되고 싶냐”고 묻는다. 한때 독립운동에 몸담았던 그는 일전에 동료인 김장옥(박희순)을 생포하기 위해 “넌 이 나라가 독립이 될 것 같냐”는 말로 회유한 바 있다. 이지민 박종대 이지운 등의 각본과 각색이 유난히 빛난다./osenstar@ose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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