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쎈 타임머신] '12년만 개방' 삼성, 외부FA 영입 성과는?
OSEN 김태우 기자
발행 2017.01.16 05: 51

국내 최대 재벌을 등에 업은 삼성은 프로야구 원년부터 트렌드를 주도한 팀이다. 프로야구 원로들은 “전체적인 지원이 좋아 다른 팀 선수들이 많이 부러워했고, 외국의 선진 문물을 받아들이는 데도 가장 적극적이었던 팀”이라고 기억한다.
프리에이전트(FA) 시장도 마찬가지였다. 2000년 문을 연 KBO FA 시장을 주도한 팀이 바로 삼성이었다. 2000년부터 2006년까지 세 번이나 역대 신기록을 세웠다. 그랬던 삼성은 두 번의 변곡점을 맞는다. 2004년 이후로는 외부 FA 영입보다는 내부 FA에 신경을 썼다. 그리고 2016년에는 한동안 쳐다보지 않았던 외부 FA와 인연을 맺으며 변화를 꾀했다.
삼성은 이번 FA 시장에서 최형우(KIA)와 차우찬(LG)이라는 팀의 핵심 선수들을 놓쳤다. 타 팀의 제안이 삼성의 카드를 능가했다. 격세지감이라는 말도 나오지만, 그 대신 이원석(4년 총액 27억 원)과 우규민(4년 총액 65억 원)을 영입하며 12년 만에 FA 시장에서 새 식구를 받아들였다. 그렇다면 삼성의 역대 외부 FA 영입 성과는 어땠을까. 좋은 투자도, 나쁜 투자도 있었다. 올해 영입은 전자가 되기를 희망하고 있을 것이다.

2000년 이강철(전 해태, 3년 8억 원)
우승에 목말라있었던 삼성은 FA 시장이 열리자마자 정상급 잠수함이었던 이강철을 영입했다. 3년 총액 8억 원의 계약 조건이었다. 지금도 적지 않은 금액인데, 억대 연봉자가 거의 없었던 당시에는 파격적인 금액이었다. 1989년 해태에서 데뷔한 이강철은 1998년까지 내리 10시즌 동안 두 자릿수 승수를 따낸 선수였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삼성 유니폼을 입고는 부진했다.
이강철은 2000년 14경기에서 고작 37이닝 소화에 그치며 1승4패 평균자책점 7.30으로 부진했다. 데뷔 후 최악 성적이었다. 1998년 시즌 후 받은 무릎 부상의 여파를 이겨내지 못했다는 평가다. 결국 3년을 다 채우지도 못했다. 이강철은 2011년 7월 해태와의 현금 트레이드를 통해 친정팀에 돌아갔고, 삼성의 베팅은 실패로 끝났다.
2000년 김동수(전 LG, 3년 8억 원)
1990년 LG에서 데뷔한 김동수는 1999년까지 6번이나 골든글러브를 수상한 당대 최고 포수 중 하나였다. 이강철과 동시에 삼성에 입단, 역시 거액의 금액을 받으며 기대를 모았다. 삼성의 취약했던 안방을 보강해줄 적임자로 기대를 모았다. 그러나 이강철과 마찬가지로 삼성과는 궁합이 잘 맞지 않았다. 2000년 90경기에서 타율 2할5리에 머물렀고 2001년에는 후배 진갑용과의 경쟁 구도에서 밀리며 89경기 출전에 머물렀다. 김동수는 2001년 시즌 후 SK와의 트레이드로 팀을 떠났다. 공교롭게도 그 후 기량을 되찾으며 2003년 골든글러브를 수상했다.
2002년 양준혁(전 LG, 4년 27억2000만 원)
FA 시장에서 한 차례 고배를 마셨지만 삼성의 투자는 계속됐다. 2002년 양준혁을 FA로 재영입하는 데 4년 27억2000만 원을 쓰며 당시 최고액(2001년 김기태·홍현우 4년 18억 원)을 갈아치웠다. 삼성에서 프로생활을 시작한 양준혁은 1998년 해태와의 트레이드로 팀을 떠나는 아픔을 겪었고, 2000년에는 다시 LG로 이적하는 등 우여곡절이 있었다. 하지만 2002년 삼성이 다시 양준혁을 품었고, 그 후 2010년까지 삼성에서만 활약하며 영구결번 지정의 영광까지 안았다.
특히 2003년과 2004년에는 리그 정상급 공격 생산력을 뽐내며 전성기가 끝나지 않았음을 과시했다. 2년간 합계 성적은 타율 3할2푼2리, 61홈런, 195타점이었다. 2002년에는 감격의 한국시리즈 우승도 맛봤다. 양준혁은 삼성에 재입단한 2002년부터 2010년까지 9시즌 동안 타율 3할1리, 143홈런, 565타점의 성적을 남기고 은퇴했다. 성공적인 영입이었다.
2004년 박종호(전 현대, 4년 22억 원)
우승의 맛을 본 삼성은 2004년 리그 정상급 내야수로 손꼽히던 박종호를 잡아 내야 전력을 보강했다. 강했던 삼성 전력에 날개를 달아주는 영입이기도 했다. 박종호는 첫 해였던 2004년 타율 2할8푼2리, 8홈런, 59타점을 기록하며 2루수 부문 골든글러브를 수상하는 등 순탄한 삼성 생활을 보내는 듯 했다. 지금도 신기록으로 남아있는 39경기 연속 안타 기록도 당시 나왔다. 그러나 그 후 부상 후유증에 고전하며 차츰 입지가 줄어들었고 2008년 방출됐다. 2004년부터 2008년까지 타율 2할6푼3리, 13홈런, 134타점의 기록을 남겼다. 용두사미 FA 계약이었다.
2005년 박진만(전 현대, 4년 39억 원)
현대의 가세가 기운 틈을 타 삼성은 FA 시장에서 또 하나의 거물급 내야수를 확보했다. 유격수 최고의 자리를 지키던, 이미 세 차례나 유격수 부문 골든글러브를 수상했던 박진만이 그 주인공이었다. 그런 박진만은 삼성 이적 후에도 나름대로 제 몫을 했다. 특히 2006년과 2007년은 수비는 물론 박진만의 경력에서 가장 화려한 공격 생산력을 뽐낸 시기로 공수 모두에서 리그 최고라는 호칭이 아깝지 않았다. 2년 연속 골든글러브도 자연히 따라왔다. 
다만 그 후로는 무릎 상태가 박진만을 괴롭혔다. 활동력이 떨어졌고 결국 2010년을 기점으로 후배인 김상수에게 자리를 내줬다. 자리가 없음을 느낀 박진만은 스스로 방출을 요청했고 2011년 SK와 계약을 맺어 2015년까지 현역 생활을 이어갔다. 박진만이 2005년부터 2010년까지 삼성에서 남긴 성적은 타율 2할6푼8리, 37홈런, 246타점으로 당시 유격수 포지션에서는 정상급이었다. 또한 국제대회에서도 좋은 활약을 선보였다. 이처럼 삼성과 좋은 인연을 맺은 박진만은 올해 2군 코치로 돌아왔다.
2005년 심정수(전 현대, 4년 60억 원)
무려 4년 총액 60억 원. KBO를 경악으로 몰아넣었던 초대형 계약이었다. 당시 심정수의 계약은 2014년 강민호(롯데)가 4년 75억 원에 도장을 찍을 때까지 10년 가까이 깨지지 않았다. 삼성의 당시 투자가 얼마나 파격적이었는지를 잘 알 수 있는 대목. 우타 거포에 대한 목마름에 이승엽의 일본 진출로 장타력이 떨어져 있었던 삼성은 라이벌 팀의 홈런 타자였던 심정수를 영입해 두 마리 토끼를 잡고자 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는 실패한 계약이 됐다. 무릎과 어깨 부상으로 온전한 힘을 낼 수가 없었다. 장타력은 그럭저럭 유지했지만 타율은 급격하게 떨어졌다. 2006년 31홈런과 101타점을 기록하며 부활하는 듯 했지만 타율은 2할5푼8리에 불과했던 것이 상징적이다. 여기에 무릎 부상까지 재발하며 몸 상태를 확신하지 못한 심정수는 삼성과의 4년 계약이 끝난 2008년(22경기 출전) 이후 젊은 나이에 은퇴를 선언했다. 삼성에서의 4년 동안 남긴 성적은 타율 2할5푼4리, 56홈런, 252타점으로 ‘몸값’에 비하면 초라했다. /skullboy@ose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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