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힙합팬이라면 1년안에 기억할 이름..커크 킴
OSEN 엄동진 기자
발행 2017.01.18 14: 39

 커크 킴. 아직 국내 힙합 팬들에게는 생소한 이름이다. 하지만 1~2년 뒤엔 국내 힙합 리스너들에게 꽤 친숙한 이름이 될 거 같다. 본토 미국에서 레이블을 만들고 탄탄하게 다진 명성이, 국내 매니지먼트와의 계약으로 빛을 볼 날이 멀지 않게 느껴지는 덕분이다.
그를 소개하기 앞서 그의 부모를 소개하는 게 순서다. 커크 킴의 뿌리이자, 음악을 하게 된 이유와 맞물리는 이유에서다. 그의 부모는 영화 '스트레이트 아웃 오브 컴턴'의 배경이 된 컴턴에서 커크 킴을 키웠다. 1985년 흑인 밀집 지역에서 레코드숍의 문을 연 이력이 눈에 띈다. 그런 독특한 이력은 역시 컴턴에서 힙합 레이블 사이커델릭 레코드를 운영하며 공연기획과 래퍼 양성에 힘을 쏟는 커크 킴이 이어받았다.    
부자의 비즈니스 또한 성공적이었다. 아버지는 전설적 힙합그룹 N.W.A 등이 활약한 미국 웨스트 힙합의 성지 컴턴에서 레코드숍을 운영했고, 아들은 힙합 레이블을 만들고, 프로듀서 스쿱 데빌(Scoop Deville), 카비리아(Kabiria)의 크리스(Chris), R&B 보컬 그레첸(Gretchen), 래퍼 앱신트(Absint) 등과 계약했다. 소속 래퍼 킬라그램은 엠넷 '쇼미더머니5'에 출연시키며 한국 시장에서의 가능성도 확인한 상태. 이어 작곡가 김형석이 회장으로 있고, 디바 이효리를 영입하며 몸집을 키운 키위미디어그룹과 아시아 지역 활동 관련 계약을 체결하며 체계화된 매니지먼트 시스템을 지원받게 됐다.  

유승준의 '웨스트 사이드' 힙합(?)이 물러간 뒤로 주춤했던 미국 본토의 웨스트코스트 힙합이, 다시 한 번 국내 음악 시장을 강타할까. 아버지가 떠난 뒤로 이어받은 아들의 꿈이 영글어 간다.
-부모님 이야기가 먼저 알려졌다. 
"부모님이 1985년 컴턴에서 제일 처음 레코드숍을 열었다. 당시엔 갱스터랩이 주류였고, 힙합음악이 대세였다. 아무래도 레코드숍을 하다보니 동네 사람들과 친해졌고, 닥터드레도 가끔 숍에 오다보니 가게가 유명해졌다. 그런데 갑자기 월마트가 생기면서 동네 레코드숍이 힘들어졌다. 그렇게 힘들 때 광고를 생각했다. 우리 스토리를 부각시켜보기로 했다. 그래서 LA타임즈에서 아버지에 대한 기사가 나왔고, 아버지의 인터뷰가 신문에 실렸다. '코리아 갱스터 갓파더' 뭐 이런 내용이었다. 그렇게 아버지가 먼저 알려졌다."
-커크는 어떻게 한국과 인연이 닿았나.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가게는 내가 맡아 운영했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음악을 시작했고 레이블을 꾸렸다. 그래도 한국에서 활동할 생각은 못했다. 한국에서 유행하는 스타일이 우리와는 맞지 않는다고 생각해서다. 그런데 지난해 '스트레이트 아웃 오브 컴턴' 영화가 한국에서 개봉했고, 한국 기자 한 명이 전화가 와서 우리 이야기를 쓰고 싶다고 했다. 그렇게 인연이 시작됐고, 우리도 한국에 오게 됐다."
-힙합 음악을 그것도 본토에서 흑인들 틈바구니에서 해온 이력이 독특하다.
"일단 힙합이 흑인 음악은 아닌 거 같다. 미국에도 부유한 친구들 그렇지 않은 친구들이 있다. 부유한 집에서는 피아노 레슨을 시키고, 그렇지 않은 친구들은 레슨을 받지 못한다. 컴턴 지역에서 멕시칸 흑인 아이들은 대부분 아버지들은 감옥에 가있고, 어머니들은 나가서 일을 했다. 그렇다보니 LP 반주에 랩을 하는게 유일한 놀이였다. 난 그래서 힙합이 흑인 음악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건 힘든 음악에 가깝다. 한국에 와서도 힘들게 살고 지쳐있는 아이들이 많이 보이더라. 그들이 힘들 때 하고 싶은말 그게 힙합 같다."
-부모님이 타지에서 그것도 미국에서 가장 위험한 도시이자 흑인 밀집 지역 컴턴에서 레코드숍을 열고 영업을 하기 힘들었을 거 같다.
"물론 힘들었다. 지금도 LA 가면 분위기가 있다. 편의점을 운영하는 한국 사람들은 흑인 손님들이 들어오면, 경계부터 한다. 훔치나 안 훔치나 그것만 본다. 반대로 흑인 사람들은 그게 불만이다. 다 같은 범죄자로 보는 시선이 싫은 거다. 그래서 아이스큐브의 '블랙 코리아'란 곡이 나온 거다. 근데 우리 부모님은 쿨했다. 그냥 사람은 사람으로 봤다. 일화도 있다. 아버지가 돌아가실 때, 난 장례식장 가기가 너무 힘들어서 차라리 숍에 나와있었다. 근데 한 손님이 아버지를 찾았다. 그러다 아버지가 돌아가셨다고 하니까 눈물을 흘리더라. 사연이 있었다. 어렸을 때 LP를 하나 훔쳐서 도망갔는데, 아버지에게 잡혔다는 거다. 그런데 경찰은 부르지 않고 '왜 훔쳤냐'고 물어봤다는 거다. '그냥 갖고 싶었다'고 답하는 아버지가 '나중에는 훔치지 말고 꼭 갖고 싶은 게 있으면 말을 해, 그럼 줄게'라고 했다더라. 나중에는 성경을 읽고 새사람이 됐는데, 그때 생각나는 사람이 아버지라 찾아왔다고 하더라."
-한국의 키위미디어그룹과 일하게 됐다.
"한국 음악도 관심이 많이 생겼다. 그러다 킬라그램이 ‘쇼미더머니’에 나가고 반응이 좋았다. 그래도 미국 사람이니까 활동은 힘들었는데, 김형석 PD를 만났다. 제게 하는 말들이 참 좋았다. 한국에서 하고 싶은 활동을 하고 자기는 뒤에서 힘든 부분을 받혀주겠다고 했다. 그 시너지가 좋아서 같이 하기로 했다."
-한국 힙합의 가능성은 어떻게 보나.
"굉장히 크다고 본다. 팔로알토 바스코 도끼 같은 래퍼를 좋아한다. 친한 동생들이고 나 역시 배울게 많다. 결국에는 한국 래퍼들을 미국에서 데뷔시키는게 목표고, 반대로 미국 래퍼들도 한국에서 활동을 시키고 싶다. 그런 계획을 세웠다. 이태원에 클럽 컴튼을 열었다. 이제 3주됐는데 사람들이 제법 많이 모인다. 그 클럽에서 음악도 듣고, 실력이 좋은 래퍼들도 많이 만났으면 한다."
-미국 시장에서 아직 성공한 동양인 래퍼는 드물다. 
"많이 바뀔거다. 동양계 친구들이 트라이를 안 한 탓이 크다. 리치치가라는 동양계 래퍼가 있는데 이제는 미국 클럽에 가면 다 그 친구 음악이다. 많이 바뀌고 있다."
-한국에서의 생활은 어떤가.
"일단 난 한국에서 태어나서 한 살 때 미국으로 갔다. 지금은 한국 미국을 왔다갔다한다. 재미있다. 음식도 잘 맞는다. 특히 오겹살에 맛을 들였다. 특히 한국의 배달 서비스는 정말 장난이 아니다. 새벽 다섯시에도 탕수육을 가져다준다. 쇼크다. 미국은 2시면 문을 다 닫는다."
-한국에서 어떤 음악을 하고 싶나.
"그냥 우리 음악이다. 다른 사람이 아닌 우리 음악. 한국 친구들은 미국 래퍼 이름을 대면서 이런 비트에 이런 음악을 듣고 싶다고 한다. 난 그게 싫다. 우리 음악을 만나고 싶다. 한국 친구들도 굉장히 뛰어나다. 자기들만의 음악을 할 수 있다. 그런 믿음도 있는데 그런 점이 좀 아쉽다. 한국의 올디한 분위기에 리듬이 빠르면서 캐치도 있는 그런 스타일을 해보고 싶다."
-'쇼미더머니'는 한국에서도 호불호가 극명하다. 어떻게 보는가.
"난 기회가 있다면 '쇼미머머니'에 우리 소속 친구들을 다 내보내고 싶다. 킬라그램이 나가기 전에는 몰랐는데, 이 프로그램이 힙합에 영향을 미치는건 맞다. 지금은 '쇼미'가 없으면 힙합신에서 어떤 결과를 보여주기 힘든거 같다. 그렇다면 나가는게 맞다고 본다. 물론 내가 그 시스템은 잘 모른다. 그래도 우리가 한국의 힙합 리스너들에게 우리 음악을 들려줄수 있었으니 그걸로 됐다."
-한국에서 힙합음악을 시작하는 친구들에게 조언을 한다면.
"만날 진짜 힙합, 가짜 힙합 얘기만 한다. 근데 내겐 진짜 가짜가 없다. 힙합은 힙합이고 자기가 좋아하면 힙합이다. 리얼과 페이크가 없다는 얘기다. 물론 좋은 음악은 있다. 그렇다면 좋은 음악을 만들었으면 좋겠다. 진짜 가짜 신경쓰지 말고 좋은 음악만 듣고 싶다." / kjseven7@ose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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