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북자에서 '버스안전 깜빡이'로...김용철 씨 "영업이 가장 어려워요"
OSEN 강희수 기자
발행 2017.05.24 10: 30

 #2002년 월드컵, 서울  
대한민국을 월드컵 응원 열기 속으로 몰아넣었던 2002년 그 뜨거웠던 여름, 당시 30대 초반의 김용철 씨는 텔레비전 중계 화면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꿈에 그리던 월드컵 무대가 눈 앞에서 펼쳐지고 있었다. 그라운드를 누비는 선수들의 거친 숨소리가 귓등에 휘몰아쳤다. 근육이 울끈불끈 솟고, 땀방울이 툭툭 떨어진다. 부드러운 잔디의 감촉이 발끝에 느껴지는 순간, 월드컵 공인구 피버노바는 발등과 한 몸이 되어 구른다.
잠시 공상에 젖어들며 만면에 미소를 띠던 김용철 씨는 이내 고개를 가로저었다. 하루 빨리 저 자유로운 광장으로 뛰어가야지. 기술도 배우고, 일도 배우고, 열심히 돈을 모아 북에 있는 딸을 데려 와야지. 북한에서 중국과 무역업을 하며 남쪽 상황을 알게 된 김 씨는 2002년 브로커를 통해 탈북했다. 위험한 고비도 넘기며 대한민국의 품에 안긴 김 씨는 한일월드컵의 뜨거운 함성을 탈북자 적응 교육시설에서 TV 중계를 통해 들어야 했다. 교육단 경비 경찰들과 함께 “대한민국!”을 외쳤다.

#1998년 양강도, ‘레프트 윙’
김용철 씨는 북한 양강도에서 성장기와 청년기를 보냈다. 중상류층 집안에서 태어나 비교적 부족한 것 없이 살았던 김 씨는 축구선수였다. 17세부터 23세까지 ‘압록강 체육단’ 소속으로 레프트 윙을 맡았다. 압록강 체육단은 프로축구 1부리그 급에 해당 하는 ‘중앙팀’ 소속이었다. 상당한 실력자들이 모인 팀이다.
현역 선수를 은퇴한 후에는 재판소 중재부에서 일했다. 중재부는 나라의 재산을 관리하고 감독하는 일을 하는 기관이다. 서른 무렵에는 국경 지대 사람들이 대개 그러하듯, 중국과 무역업에 나서게 됐다. 중국을 통해 좀더 넓은 세상을 알게 되고, 남쪽 상황도 알게 됐다. 
탈북에 성공해 서울에서 자리를 잡는 과정에서도 김 씨는 여유가 있을 때는 조기축구를 즐겼다. 당당한 체구와 시련에도 좌절하지 않고 도전하는 의지는 그라운드에 흘린 땀방울과 함께 맞들어졌다.
#2017년 서울 양천구
서울 양천구 오목교역 인근의 자그마한 상가주택. 여느 사무실처럼 엘리베이터도 없다. 계단을 타고 한 층을 내려가야 했다. 대낮에도 불을 켜지 않으면 안 되는 지하 1층 사무실이 열렸다.
28평 남짓한 사무실 공간에 간단한 응접 세트와 책상 서너개, 그리고 각종 기구들. 사무실 중앙에 길게 자리잡은 작업대도 보였다. 작업대 위에는 각종 공구들과 조명 기구에 들어가는 부품들이 가지런히 정리 돼 있었다.
인사를 나누고 다시 찬찬히 공간을 살펴 봤더니 전기 밥솥과 세탁기도 공간 한켠에 자리잡고 있었다. 김 씨의 사무실이며, 작업실이고 동시에 거주공간이었다. 작업대를 돌아 구석으로 들어가니 계단 아래 자투리 공간에는 작은 침대가 놓여 있었다.
올해 49세의 김용철 씨는 월세 41만 원 짜리 지하공간에서 ‘세상의 큰 빛’이 되겠다며 꿈을 키우고 있었다. ‘세상의 큰 빛’은 김 씨가 차린 회사의 이름이기도 하다. ‘Big Light’에서 첫 글짜를 따 ‘BL전자’라고 회사 이름을 지었다. ‘큰빛’의 느낌이 예사롭지 않아 다시 한번 물었더니 “존경하며 따르는 목사님이 있는데, 그 분이 이끄는 교회 이름이 ‘큰빛 교회’이다”는 답이 돌아 왔다. 
#아직은 세상의 작은 빛
김용철씨는 꿈 꾸는 ‘세상의 큰 빛’은 작지만 의미 있는 조명 기구에서 출발한다. 작은 아이디어에서 출발했지만 사람의 생명을 지키고 구할 수 있는 의미 있는 상품이다. 탈북 이후 남한에서 조명기구 제작업체와 조명 디자인 회사에서 수 년간 일한 경험이 크게 도움이 됐다.
김 씨는 그 사이 북에 있는 딸을 데려오기 위해 악착같이 돈을 모았고, 마침내 꿈에도 그리는 딸을 데려와 함께 생활할 수 있게 됐다. 어린 딸을 혼자 키우게 되니 돈이 더 필요했고 처우가 낫다는 버스 회사로 직장을 옮겼다. 하지만 이마저도 교통사고가 나는 바람에 버스 운전을 더 할 수가 없었다. 곡절은 많았지만 조명기구 제작 경험과 버스 운전은 사업 아이디어의 밑천이 됐다.
‘BL전자’의 첫 작품은 버스의 사이드 미러 바깥에 부착하는 ‘안전 조명’이다. 버스의 사이드미러는 운전자에겐 후방을 확인하는 눈이 될 수 있지만 버스를 타기 위해 대기하는 승객들에겐 흉기가 될 수도 있다. 더구나 서울의 중앙버스 차로에서는 승강장이 도로보다 높아 대기 승객의 키 높이와 버스의 사이드 미러 높이가 거의 일치한다. 중앙버스차로 승강장에서 버스를 타본 이들은 얼마나 아슬아슬한 순간이 많은 지 실감할 수 있다.
불안감은 버스기사들도 마찬가지다. 운전자 입장에서는 승강장에서 조금이라도 먼저 타기 위해 뛰어오는 사람을 보면 심장이 쪼그라든다. 규정상에는 승강대 30cm 이내에 버스를 붙이게 돼 있지만 승객과의 충들 사고를 염려한 기사들은 그러지를 못한다. 이로 인해 버스는 전용차선을 벗어나 일반 차도를 침범하기까지 한다. 특히 야간에는 더욱 위험하다.
김용철 씨는 이 같은 위험에 착안해 버스 사이드미러에 붙일 수 있는 안전등을 개발하기로 했다. 버스 배터리에서 전원을 끌어쓰면 시공이 복잡해 지기 때문에 태양광 충전 방식을 택했다. 이 방식은 필요할 때문 켤 수 있도록 스위치도 필요로 했다.
결과적으로 BL전자의 제품은 전원 연결이 필요 없으며, 실치가 간단하고, 버스를 운행할 때만 키거나 끌 수 있어 조작성이 편리한 특성을 갖추게 됐다.
BL전자에서 개발한 또 하나의 아이디어 상품은 비상용 경광등이다. 일반 차량을 이용하고 있는 경찰이 비상시에만 차 지붕에 붙이는 착탈식 비상 경광등을 생각하면 된다. 그런데 용도가 다르다. 경찰처럼 비상 출동 때 쓰는 게 아니고, 차가 고장이 났을 때 차량 후방에 설치해야 하는 ‘안전삼각대’ 대용이다.
이 제품은 디자인이 차량용 액세서리처럼 돼 있다. 평상시에는 대시보드 위에 올려놓아 충전을 해 놓았다가 야간 비상시에 차 지붕 위에 올리고 스위치를 켜기만 하면 된다. 후방에서 오는 차들은 비상 경광등을 보고 상황을 감지하게 된다.
#영업이 가장 어려워요.
좋은 상품을 만들어 놨지만 사업은 그걸로 완성 되는 건 아니었다. 시장을 개척하고, 제품을 팔아야 하는데 그게 결코 녹록치 않았다.
김 씨는 무작정 버스 회사를 찾아 갔다. 기사들에게 제품을 설명하고 실제 버스에 설치해 얼마나 유용한 지를 보여줬다. 기사들의 반응은 좋았다. 야간 운전시 정류장 승객과의 충돌 우려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고 있던 기사들은 “당장 달았으면 좋겠다”고 했다.
하지만 우리나라 노선버스는 지자체의 준공영 체제를 따르고 있는 곳이 많다. 안전등을 새로 달기 위해서는 개별 운송 회사는 조합에, 조합은 다시 관리를 맡고 있는 지자체의 결정을 받아야 하는 구조다. 개당 4만 8,000원 정도 하는 ‘안전 지킴이’이지만 실제 노선 버스의 사이드미러에 장착되기까지에는 넘어야 할 산이 너무 많았다.
발로 뛰고, 매달리기를 수 차례, 경기도 일부 지역과 부산 일부 지역에 2500대 가량을 달았다. 하지만 전국을 누비고 있는 버스가 5만 여대에 달하는 것에 비하면 영업은 갈 길이 멀다.
2013년 큰 꿈을 안고 회사를 차렸지만, 그 사이 형편은 더 쪼들려 갔다. 전셋집을 빼서 회사 운영비에 보태는 바람에 사무실 한 켠에서 기거를 시작했다. 그 사이 탈 없이 잘 자라 준 딸은 서울 시내에 있는 대학 진학을 앞두고 학교 근처 원룸으로 옮겼다. 때아닌 생이별이다. 회사 소유로 갖고 있던 차도 팔았다. 그나마 영업이라도 나가려면 대중교통을 이용해야 했다.
갈수록 사정은 더 나빠져 작년 12월 5일, 결국 회생신청을 했다. 매월 50만 원씩 갚아나가는 조건이다. 이마저도 빠듯하지만 그나마 꿈을 더 이어갈 수는 있게 됐다. “월급은 없어요”라며 씁쓰레한 웃음을 짓는데, 여운이 오래 남았다.
#”그래도 항상 감사하죠. 주변의 도움이 많았어요”
김용철 씨와 ‘BL전자’가 품고 있는 희망 한 켠에는 늘 ‘감사’가 따랐다. 탈북 후 남한에서도 많은 어려움이 겹쳤지만 그 때마다 주변의 도움으로 버텨낼 수 있었다고 김 씨는 말한다. 직장 동료, 교회 목사, 주변의 격려까지 그가 계속 힘을 낼 수 있는 에너지원이었다.
그중에서도 대학 입학을 앞 둔 딸아이는 김 씨의 존재의 이유였다. 7살 때 탈북해 남한에서 초중고교를 나와 또래 아이들과 다를 바 없이 성장했다. 하지만 자신이 다른 친구들과 처지가 다르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았던 모양이다. 자연적으로, 또는 일부로 찾아서로도 한번은 겪게 되는 사춘기도 딸 아이에게는 없었다. 이게 더 가슴아프다고 김 씨는 말했다. “딸 아이라고 왜 사춘기가 없었겠어요. 한 번도 티를 안 내고 아빠 마음을 먼저 챙겨 준 딸아이한테 미안하고 고마울 따름이죠.”
김 씨의 사연이 알려지게 된 계기도 있었다. 현대자동차의 청년창업 캠페인인 ‘기프트카’다. 작년 7월 회사 직원이 기프트카에 사연을 접수했고, 그해 10월에 지원 대상에 선정 돼 차(스타렉스)를 받았다. 김 씨는 이 차마저 아끼고 아껴서 사용하고 있었다. 차 안은 작은 서류함도 설치해 이동 사무실로 이용할 수 있도록 했다. 6개월 남짓한 시간 동안 3700km를 뛰었다. 기름값도 부담스러워서 꼭 필요한 경우가 아니면 여전히 대중 교통을 이용한다고 한다.
#”버스 안전이 우선이죠”
김용철 씨와 ‘BL전자’는 비상 경광등이 잠재 성장력이 더 높아 보인다는 말에 “그래도 버스 안전이 우선이죠”라며 웃는다.  버스 기사 생활을 하며 절실하다고 느꼈고, 지금도 도로를 누비고 있는 기사들의 불안감을 조금이라도 덜어주고 싶다는 게 김 씨의 마음이다.
비상 경광등은 평소에는 차량용 소품으로 비치할 수 있기 때문에 연인이나 가족에게 선물하는 소품으로도 어울린다.
좋은 제품을 개발해 놓고도 판로가 없어 상품이 창고에 쌓여 있다는 건 사회적으로도 손실이다. 김씨는 회사를 꾸려가기 위해 일이 없을 때는 건설 현장에 나가 돈을 번다. 딸아이는 벌써 고깃집에서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김 씨는 “영업이 가장 어렵다”고 말하지만 또 어떤 이는 “좋은 제품만 있으면 파는 것은 문제가 아니다”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김 씨의 아이템과 영업이 가능한 어떤 이는 꼭 만나야 한다. /100c@osen.co.kr 
[사진] 탈북자에서 버스 안전 깜빡이를 만드는 사업가로 변신한 김용철 씨. /손용호 기자 spjj@ose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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